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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거절을 못 할까?

거절을 못 하는 이유

by 발견하는 상담사

거절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누군가의 부탁과 요구를 거절하기가 어려워 내키지 않아도 들어준다. 문제는 내키지 않는데도 들어주는 것이 반복되면 감정적으로 힘들어진다. 처음엔 ‘한 번 해주고 말지’라는 마음으로 들어주었는데, 다음에도 상대가 똑같은 요구를 반복하면 기분이 안 좋아지기 시작한다. ‘한 번 해주고 말지’라는 마음에는 ‘자신의 희생을 알아주겠지’라는 마음이 숨어 있다. 그 마음을 알아주면 좋으련만, 알아주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희생을 계속 요구하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기분이 안 좋다고 표현할 수가 없어 쌓여만 간다. 거절을 못 하는 사람은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


거절을 못 하는 건 자신의 거절에 상대가 속상하고 슬프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상대가 속상하고 슬플 거라고 예상되는 말이나 행동은 거절하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상대에게 거절뿐만 아니라 상대의 기분이 상할만한 건 할 수가 없다. 심하게는 상대의 기분이 좋아지게 하려고 애를 쓴다. 이 지경에 이르면 자신의 모든 관심이 상대에게 집중된다. 상대의 기분을 살피고 상대의 말과 행동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살피고 반응한다.


이들은 상대에게 맞추어주면서 자신의 감정을 꾹꾹 참다가 더는 견디기 어려우면 관계를 칼로 자르듯 끊어버린다. 끊는다고 능동적으로 표현했지만 어쩌지 못해서 도망가는 거에 가깝다. 아무런 말도 예고 행동도 없이 도망가버린다. 이런 관계의 단절이 친구, 동료 또는 지인과는 가능했지만, 가족과의 관계는 무 자르듯 관계를 끊어버릴 수가 없다. 이들이 가족과의 관계가 어려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힘들어하는 이유이다.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하는 말이 “내가 참고 말지, 나만 참으면 다 편해질 거다”이다. 이들에게 ‘더는 참지 못하겠고, 하고 싶지 않다’라는 말은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할 거고 상대를 거절하는 거다. 상대를 기분 나쁘게 만드는 거절을 하느니 자신이 참고하는 게 더 낫다. 이들은 상대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는 게 너무 힘들다. 상대가 기분 나쁘면 자신을 싫어할까 봐 걱정되기 때문이다. 싫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봐 두렵다. 나쁜 사람은 피하고 싶을 테니 관계를 끊어버릴 것으로 생각한다. 여기까지 생각이 들면 거절을 절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상대를 기분 나쁘지 않게 하거나 기분 좋게 해줘야 한다. 이들이 많이 쓰는 말 중에 ‘~해줘야 해요’가 많다. 자신이 자꾸 무언가를 해줘야 상대가 기분이 나쁘지 않거나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이들이 자신을 점점 제쳐두면서 상대에게 맞추게 된 이유가 있다. 각자의 개인적인 삶의 역사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가장 많이 보이는 이유는 어릴 적 부모 혹은 양육자와 맺었던 관계가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아이는 절대적으로 부모와 양육자에게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아이가 양육자(대부분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은 생존이 걸린 문제다. 아기는 태어나 긴 시간 동안 스스로 스스로 생존을 유지할 수 없다. 생존하기 위해서 아기는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따라서 인간은 철저하게 양육자에게 의존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있다. 그것도 꽤 오랜 시간 동안. 아이가 양육자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하는 건 생존을 위한 당연하게 갖추고 발달시켜야 할 능력이다. 아이는 끊임없이 버림받지 않으려 방법을 찾고 발달시키며 자신이 버림받지 않을 것이라는 증거를 확인하려 한다. 그 증거의 대표가 사랑이고 관심이며 인정이다. 인간은 사랑과 관심, 인정을 욕망해야 한다. 욕망이 사라진 인간은 죽는다.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써보고자 한다.





너무 바빠 아이를 잘 돌볼 수 없는 부모가 있다. 부모는 아침 일찍 나가 저녁 늦게나 집에 돌아와 잠깐 아이를 볼 수 있었다. 어린 막내는 옆집 할머니가 돌봐주거나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어느 날 아이는 엄마가 집에 돌아와서도 힘들게 집안일을 하는 모습이 생각났다. 아이는 엄마를 돕고 싶은 마음에 청소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엄마는 청소가 되어있는 집을 보고는 놀라 아이에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물었다. 아이는 자신이 청소했다고 대답했다. 아이는 그 순간, 엄마가 자신을 보고 웃는 모습을 보았다. 엄마가 자신에게 그렇게 웃어준 것이 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 후로 아이는 엄마가 돌아오기 전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집안일을 하기 시작다.


엄마는 아이를 보고 웃어주기도 하고, 칭찬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아이는 꽤 오랜 시간 집안일을 맡아서 했다. 그런데 엄마의 웃음과 칭찬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아이는 더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것을 찾기 시작했다. 아이는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했다. 숙제는 물론 준비물 챙기기, 신발 빨기, 엄마가 시킨 건 싫다고 안 하고 다 하기, 엄마가 하지 말라는 건 절대 안 하기, 하고 싶은 것 눈치껏 포기하기….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는 할 일보다 포기하는 것이 늘어났다. 결국, 아이는 다른 형제들을 위해 대학을 포기해야 했다. 아이는 성인이 되었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 그리고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성인이 된 아이는 남편과 아이가 웃는 일을 알아서 해준다. 남편과 아이가 기분 나쁠 일은 하지 않는다. 그게 자신이 해야 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좋았다. 그런데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다. 남편은 아내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아이는 더는 엄마의 말을 듣지 않으며 엄마에게 끊임없이 요구한다. 성인이 된 아이는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가상의 사례이지만, 의외로 주변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현실의 이야기다. 무력한 아이가 생존을 위해 사랑받고자 선택한 방식인 ‘순응’이 아이의 관계 방식으로 굳어져 버렸다. 굳어져 버린 관계 방식은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까지 이어진다. 더는 무력한 존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력한 아이의 생존방식으로 대상들과 관계를 하는 것이다. 아이 때는 필요하고 적절했던 관계 방식이지만, 성인인 지금은 불필요하고 적절하지 않다. 심지어 부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균형 있고 긍정적인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방식을 알지 못하게 된 것이다.


성인이 된 자신이 여전히 아이의 관계 방식으로 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현재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나의 관계 방식이 아이의 관계 방식인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과거의 미성숙한 관계 방식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이 확인된다면 변화가 필요하다. 누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사진: 작가 wirestock 출처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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