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민감한 사람이다. 아마 난 예전부터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남들과 다른 것이 민감한 특성임을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누구에게도 내가 민감한 사람임을 밝혔던 적도 없었고, 남들과 다른 나의 특성을 민감함 때문이라고 나 지신을 이해했던 기억이 없는 것 보면 말이다.
상담장면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많은 수가 민감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고, 민감한 사람에 대한 관심과 공부를 저절로 하게 되면서 내가 민감한 사람임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특이하다 생각했던 나의 특성들이 민감함 때문임을 점점 확신하게 되면서 신기하고 놀라웠다. 그리고 동시에 그동안 나에 대한 의문의 답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상담사로서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무수히 강조했던, 나를 받아들이는 작업을 진짜로 하게 된 것에 기뻤다. 이제껏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어느 정도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면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커진 것도 사실이다.
내가 민감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배제하고 다른 것으로 나를 이해해 왔던, 다소 억지스러운 이해들이 떠올랐다. 쉽게 지치고 피곤함을 많이 느끼는 게 타고난 저질체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어머니도 그러했기에 유전된 체력이라고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체력을 키우기 위해 좋아하지도 않은 운동을 애써 했다.
물론 운동이 체력증진에 도움이 되긴 했다. 다만 심적으로 지친 것과 체력의 약함을 구분하지 못하고 운동을 한 것이 종종 문제를 일으켰다. 심적으로 지치고 스트레스가 많을 때 일정대로 운동을 하면, 꼭 지독한 감기와 몸살을 앓았다. 그리고 한참을 운동도 못하고 회복도 더뎠다. 나의 민감한 특성을 명확히 이해했다면, 운동이 아니라 휴식을 가졌어야 했다. 몸도 마음도 모두 말이다.
나는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지치고 힘들었다. 난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사람들과의 만남 후에 지치고 소진되는 내가 이해가 안 갔다. 내가 민감한 사람임을 확신하게 되면서 사람들을 만난 후 지치는 나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기꺼이 조절하려고 한다. 더는 내가 바꿔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민감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특성 중 하나인 신중함이 나에게도 있다. 신중한 특성으로 나는 실수가 적은 편인데, 바쁜 상황이나 여러 가지 일을 한꺼번에 했을 때는 큰 실수를 종종 하는 날 보면서 내가 신중한 건지, 덜렁거리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 특성도 이제는 이해를 한다. 민감한 사람은 자극이 많은 상황을 감당하기 어렵다. 많은 자극에 누구나 당황하고 실수하기 마련이지만, 민감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그 정도가 심하다. 그냥 실수가 아닌 큰 실수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 외에도 카페인에 영향을 많이 받고 취약해진 상황에서는 소리에 지나치게 예민해진다(집 안에서 아이들이 평소와 같이 떠들어도 그 소리가 견디기 어렵다).
이제는 아이들이 다 자라서 내 품을 더는 내 손길이 필요하지 않게 되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개인 사무실을 오픈하면서 혼자 있는 공간도 생겼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나에게 혼자 있는 시간과 공간이 얼마나 필요했는지 말이다. 내가 혼자 있는 시간과 공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다. 민감한 나에게 오래전부터 필요했던 것을 이제야 스스로에게 제공하게 되었다. 민감한 사람들에 관해 연구하면서 나와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포부도 생겼다. 나와 같은 민감한 사람들의 삶이 풍요로워지길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다.
커버이미지 사진: Unsplash의Laura Smets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