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견하는 상담사 Feb 16. 2024

치유의 시작, 분노에서 슬픔으로

   

분노는 흔히 피상적인 단계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깊은 내면에 있는 감정에 접촉하는 것보다는 피상적인 분노에 머물러 있는 게 더 편하다. 깊은 내면의 슬픔과 무기력감에 접촉하고 받아들이는 게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바꿀 수 없다.’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상실감과 상처는 없어지지 않는다. 상실감과 상처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분노는 슬픔으로 바뀌게 된다. 슬픔은 사람들을 곁으로 불러들이지만, 분노는 멀어지게 만든다. 슬픔은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분노에 머물러 있으면서 우리는 치유의 기회를 놓치고 있다.

      



종종 상담장면에서 상담사의 공감을 불편해하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상담사의 공감해 어색하고 어쩔 줄 몰라하기도 하기도 하고, 차갑게 굳어 버리기도 한다. 이들은 자신의 감정에 타인이 공감해 주는 것을 위협으로까지 생각하기도 한다. 이들은 꺼내 보고 싶지 않은 내면의 감정을 상담사에게 들켰을 때, 감정이 걷잡을 수 없게 커지게 될까 봐 두렵다. 사실, 공감과 위로를 받고 싶었던 내면의 욕구를 억누르기가 힘들어지고 억제할 수 없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억제할 수 없어 감정이 터져버렸을 때 상대의 반응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방어기제이다.      


방어기제는 자신을 보호하는 장치이다. 때문에 쉽게 방어기제를 없애야 한다고 조언하거나, 스스로 없애야 한다고 애쓰는 건 위험하다. 방어기제를 버리면, 자신에게 날아오는 화살 앞에서 갑옷을 벗어던지고 서 있는 것과 같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것이 화살이라면 갑옷은 분명히 자신을 보호해 준다. 그러나 화살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화살이 아니라면? 끝이 뭉뚝한 화살이라면? 나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면?


자신에게 날아오고 있는 것이 뾰족하고 나를 향한 화살이라 여기고 지레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면 확인할 길이 없다. 눈을 바로 뜨고 확인해야 한다. 뾰족한 화살이 아니거나, 나를 겨냥한 것이 아니고, 내가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거였다면, 더 이상 갑옷은 필요하지 않다.      


지금까지 분노라는 갑옷으로 무장하고, 공감과 위로를 거부하고 피하는 방패를 쓰고 있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자.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사람 앞에서 갑옷과 방패를 버리고 갑옷 안의 나를 보여주는 용기를 내보자. 그들이 내어주는 공감과 위로를 경험해 보자. 그리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자. 어린 시절의 경험은 바꿀 수 없지만, 지금의 나는 바꿀 수 있다. 

    

더 이상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한다.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사진: UnsplashWilliam Farlow

작가의 이전글 민감한 부모의 육아와 쉼의 균형 찾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