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최인훈
명준은 북에서 은혜를 만나 사랑을 경험할 적에 그 수많은 강렬한 욕망들의 집합 속 돌파구를 찾으려 하면서도 동시에 희한한 종류의 안도를 하는 본인을 이해할 수 없어했습니다.
은혜는 그야말로, 그 시절 문학에서 그려내던 여자다운 여자 - 구식이다 비난하기엔 실로 그렇게 표현해내던 수많은 작품들이 있었잖습니까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체제와 사상에 신물이 난 사람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다름 아닌 무지한 사람인 것을 우리 모두 은연중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본디 자아를 태워가며 사색과 고뇌에 열중하는 이는 재만 남기기 쉽습니다.
은혜는 순진하고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놀라우리만치 열정 없고 명준을 혼란하게 만드는 그 어떤 것들에 모조리 무지합니다. 무지한 사람에게서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명준을 버틸 수 있게 만들었을 지도요.
저 또한 세상사에 깎이고 무뎌져 제 스스로가 침식되어가고 있음을 분명히 인지하였을 적 가장 필요하다 여겼던 이가 바로 무지한 이었습니다. 아무 걱정도 없고 아무 근심도 없는. 멍-청-, 하다고 말하기엔 너무나 그럴듯한 위로였습니다.
그런 것들로 시끄러워도 이렇듯 아무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세상은 생각보다 단단하고 흔들림이 없다, 네 존재보다 거대하고 예상보다 지대하다, 흔들리는 것은 오직 너 하나뿐이다. 무지한 이들이 때론 세상의 증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였고 동시에 부러웠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세상을 증명해낼 수 있다는 것이요, 끝없이 부딪히고 깎여나가는 자아들 속 유일히 온전할 수 있다는 것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