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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 Jun 12. 2023

카르마

사랑에 관한 단편집

영원이라는 말이 뭔가. 7살 때까지만 하더라도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말을 남발하던 부모님은 이수가 17살이 채 되기도 전에 갈라섰다. 그 꼴을 보며 그가 말하기를, 영원이라는 말이 뭔가. 실체 없는 허상. 원래 말로 하는 건 다 구라임을 전제로 깔고 들어가는 거라고. 사랑 그거 그냥 말인데, 말 바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쉽다고.



귀 아픈 음악이 새어나오는 클럽 입구를 삐뚜름하게 꼴아보며 또 그런 생각을 했다. 새벽 네시에, 세시도 아니고 다섯시도 아니고 잠이 제일 온다는 네시에 너를 데리러 가잖아, 내가, 너를. 이건 뭘까. 이건 사랑이 아닌데, 왜 여기 있는 걸까.



마음을 주지 않고 사랑하기란 여러분의 짐작보다 꽤 할만한 일이다. 사랑한다는 말에서 알맹이를 빼내고 누군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임을 복기한다. 스스로의 오만에 자화자찬을 한다. 야, 방금 내가 너를 가지려고 했어, 주제 파악이 덜 됐어 아직. 마구 웃는다. 체념은 덤이다.



이수의 인생에 20세기란 없다. 새 미래, 새 로운, 새 소년. 시대의 균열과 함께 태어난 게 자신이다. 그리고 그 옆의 최수현. 이수의 카르마를 모두 모아 만든 결정체. 최수현의 따까리를 자처하며 얻은 건 또 뭔가. 굳이 따지자면 속죄의 개념이다. 연줄 끊는게 면발 끊기보다 쉬웠던 지난 24년을 반성하고 또 반성하며 오늘도 최수현을 찾는다. 무례했던 종내의 제 모습을 떠올리며, 제게 달려드는 수치를 반긴다.



그렇지만 이미 끊긴 인연에 구태여 보탤 말이 있나? 그때의 선택은 그 나름의 최선이었음을 이수는 안다. 이수만 알아 문제지만. 그렇지만 또 동시에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는 것도 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모든 중요한 문제는 만날 때가 아니라 헤어질 때 발생한다. 다신 안 볼 것 같더라도 갖춰야할 최소한의 예의가 있는 법인데 이수는 그걸 나몰라라 쌩깠다. 겉으로만 무던한 척. 기저에 깔려있는 회피가 실은 본성이라. 그런 식으로 덜 익은 고기 자르듯, 엉망으로 잘라낸 인연들이 이제와 이수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술에 취해 개떡이 된 수현을 내려다보며 이수는 웅웅대는 귓가를 틀어막았다. 그래도 이십대 초반엔 저 소리들이 아주 싫진 않았던 것 같은데. 스물 넷이 별거라고, 뭐든 시끄러운 소리라면 아주 질색을 하게 되었다. 사람이 가을철 벼이삭 마냥 빽빽하게 심어져있는 클럽 안을 온통 휘저으며 수현을 찾아다닌 탓에 기진맥진했다. 그 정도가 지나쳐서 의식조차 없어 뵈는 수현을 데리고 무언갈 해보자니, 바로 앞 편의점을 가는 것조차 버겁게만 느껴졌다. 수는 절망적인 제 체력을 실감하며 널브러진 수현 옆에 주저 앉았다. 속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짜증을 참아내기란 익숙해질 일 없을 고역. 수현은 그런 존재였다. 이수가 가진 인내의 역치를 번번히 늘려주었다.



곳곳에 버려진 담배 꽁초들이 역했다. 다 씹힌 필러에 묻은 누군가의 립스틱과 숨. 수는 문득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어느샌가 수현은 수에게 기댄 채였다. 여름이 코앞으로 다가오긴 했는지 한밤중인데도 후덥지근했다. 셔츠의 앞섶을 쥐고 펄럭대며 바람이 좀 불어줄지 말지 고민했다. 제가 바람이라면 이런 꼴들을 굳이 보러 오진 않을 것 같았다. 바로 맞은 편 건물 사이에선 여자 둘이 키스를 했다. 2층 술집에선 고성이 들려왔다. 개발 새발하는 욕설은 필수였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면 여전히 최수현. 이수는 그들과 더불어 함께 멍청해지고 있었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채 모든 곳에 속한 냥 굴고 있는 것이다.



어어, 이대로 가다간 일 치르겠는데.



사랑이란 말이 뭔가. 새벽 네시에 클럽이나 나도는 애 하나 챙기러 택시를 잡고 할증 붙은 요금을 내고 땀 뻘뻘 흘려가며 담배 말린다는 생각이나 참아보는 거? 아무리 생각해도 싼마이다. 영원이란 말을 믿지 않기로 다짐한 순간 부터 이수에게 사랑은 없는 말이 되었고 최수현은 그의 안에서라면 앞으로도 어떻게든 배제될 게 뻔했다. 정의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시작하는 관계가 얼마나 피곤한지 이젠 아주 알게 되어 버렸다. 더불어 제 안의 고집이 얼마나 지독한지도.



한번 꺾이고 말면 그만인데, 새벽 네시에 잠도 못 자게 만드는 최수현이 너무 괘씸해 도무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여름이라 그런지 해가 빨리도 떴다. 푸르스름한 새벽하늘이 어울리지 않게 담백했다. 가실 줄 모르고 번쩍거리는 네온 사인, 다 번진 화장과 옷에 베인 싸구려 향수냄새, 공기 중에 떠다니는 알코올과 니코틴.



" 야, 일어나."



마치 기다렸다는 듯 최수현이 세상 개운한 표정으로 깨어난다. 피곤하다거나 매달리거나 하는 기색도 없다. 지갑에서 현금 몇 장을 대충 꺼내 수현의 손에 쥐어준 수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수에게 한껏 기대고 있던 수현만 순간 기우는 몸에 갸우뚱한다.



"집 찾아갈 수 있지, 나 간다."



수현은 뭐라 대꾸하지도 붙잡지도 않는다. 그러기로 작정한 모양이지. 떠나가는 이수를 되려 관찰하는 꼴이다. 이수는 이런 게 싫었다.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아무것도 아닌 사이에. 뒤돌아 성큼 성큼 걸음을 내딛으면 뒤에서 들려오는 한마디.



"야!"

"."

"나도 사랑해!"



입발린 말을 잘도. 이수는 금연 105일 째 타이틀을 무사히 지켜낸다. 아침을 챙겨 먹고 잘까. 우스운 고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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