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우울>
내가 나인 게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다. 습관적으로 죽음을 상상하고 필연적으로 나락에 떨어질 것이며 누구에게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가정을 한다. 실체 없는 허무와 무력감이 삶에 늘 도사리고 있었다. 뇌의 한 부분에 하자가 있는 채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면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자신을 망치겠는가. 이 문제를 과연 고칠 수 있긴 할까. <한낮의 우울>은 그 문제들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제시했다. 책을 다 읽었다고 해서 우울을 치유 가능한 것으로 여기진 않았다. 다만 정도의 차이는 있었다. 아주 얕은 수준의 불안과 죽음을 안고 산다면, 한결 수월한 기분이겠다고. 그럼 내가 정해둔 삶의 기간을 다 채우고도 훨씬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우울이라는 카테고리를 폭넓게 다룬다. 중독, 자살, 역사, 가난, 정치, 진화 등을 통해 우울증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것과 더불어 앤드루 솔로몬은 자신이 겪은 우울증 삽화를 진솔하게 펼쳐놓음과 동시에 다른 우울증 환자들의 일화를 소개한다. 너무도 많은 견해와 깊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장 뚜렷하게 느낀 감상은 치유에 대한 작가의 간절함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마음의 문을 열고 다른 사람들과 고통을 나눠야 한다고 말한다. <한낮의 우울>은 그 자체로 대화의 장이 된다. 한편으로는 실제로 사람과 대면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 될 수도 있다. 저 멀리 미국과 유럽에 있는 사람들도 공통된 마음을 갖고 있음을 확인받는다. 우울증 환자들은 이해받지 못할 거라는 확신을 통해 고립을 선택하게 된다. 타인이 그들의 생각을 변화시킬 기회를 주지 않는다. 하지만 <한낮의 우울>은 어떤 억압도 없이 환자 스스로 생각을 고칠 수 있게 만들 것이다. 외롭지 않다는 걸 깨닫게 만든다. 나아지고 싶다는 의지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나 역시 그 희망을 느꼈다. ‘한낮의 햇살’과도 같은 구원의 메시지를 전파한다.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자살’ 파트였다. 나 역시도 그동안 자살이 우울증의 결론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울증은 꼭 자살로 이어지지 않기도 하고, 우울하지 않은 자살 역시 존재한다.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우울증을 다룰 때 잊지 말아야 할 사고의 유연성은 책의 내용을 더욱 다채롭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유연성은 병에 대한 깊은 이해로도 연결되었다. 책의 구성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희망을 암시하고 그것을 추구해야 된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우울증은 변덕스럽고 ‘뻔뻔스러운 면이’ 있다. 원인이나 해결책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없으며 그 불확실성이 환자의 혼란을 가중시킨다. 따라서 결국은 이겨낼 것이라는 막연한 주장을 한다면 독자는 맥이 빠질 것이다. 치유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약을 평생 먹어야 될 수도 있고 한 번의 내원으로 나을 수도 있다. 수많은 개별적인 배경에 대한 존중이 깔려있기에 앤드루 솔로몬이 건네는 위로가 진정한 힘이 되고 구체적인 미래를 그려볼 수 있도록 만든다.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집중해야 한다. ‘무지의 소치’인 오명을 무시해야 한다. 세상 모든 소리에 휘둘리다 보면 상처는 덧나기 마련이다. ‘학습된 낙관주의’가 필요하다. ‘아름다운 생각, 아름답고 멋진 생각을 해라. 그러면 고통이 누그러질 것이다.’ 자꾸만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된다. 그런 생각은 높은 곳에 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세상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다. 도움을 받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우울증은 외부에서 침입한 게 아니다. 모든 사람의 정서 안에 있다.’ 상태가 호전되었을 때 더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나눠주면 된다. 기분이 가라앉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줄이고, 죽음을 내일로 미루면 된다. 부정과 긍정을 번갈아 느끼면 된다. 곧 우울에서 허우적거릴 때도 긍정을 떠올릴 수 있게 되며, 일반적인 삶에 대한 소중함은 커지게 될 것이다. 그 동시성은 영원할지도 모르지만 잠깐이라도 행복할 수 있다면, 실은 죽고 싶지 않지만 결국 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비극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