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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아리 Jan 06. 2023

첫 판정

경계선 지능으로 판정됐을 때

  첫 판정은 2019년 초였다. 그 전해에 나는 올림픽공원이 근처에 있는 방이동 인근 샤브샤브집에서 한 달간 일했다. 거기서 나는 매니저와, 함께 일하는 이모라는 여자에게 모진 갈굼을 받았다. 그들의 갈굼은 지속적이고 집요했다.

  

  첫날부터 일이 맞지도 않았다. 나는 늘 코스를 헷갈렸고 세팅 실수를 했다. 친구와 같이 했지만 내 적응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하루에 수많은 테이블을 돌고 몰아치는 손님들을 받느라 일이 고되기도 했다.

   나는 결국 나에게 가해지는 그 폭력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밤 11시 30분 즈음, 지하철 5호선 방이역 한복판에서 수면제 아홉 알과 정신과약 일주일치를 친구가 보는 앞에서 털어 넣고 전철 안에서 실신했다. 한양대 병원으로 급히 이송됐고 자살 시도자들에게 이레 그러하듯 퇴원 후 사후대응관리 차원에서 생명 전화가 2주 정도 갔다. 나는 내가 사는 지역 보건소로 연계됐는데 보건소 상담을 받던 중 심리검사가 필요할 것 같다는 사회복지사의 의견에 따라 국가 지원으로 종합심리검사를 받게 됐다.


  심리검사인줄만 알았으나 받아서 읽어보니 심리검사보다는 지능검사였다. 어쩐지 검사받을 때 여러 가지 복잡한 테스트를 하더라니. 나는 언어 지능만을 제외한 모든 지표에서 두 자릿수, 그것도 70대를 넘지 않는 수치를 받았고 종합 지능 74의 경계선 지능으로 판정됐다.


  첫 판정을 받던 날의 감정을 잊을 수 없다. 끝도 없는 수치심과 절망감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를 지탱했던 세상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내 안에서 분노가 되어 치밀어 올랐다. 나는 판정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완전히 부정했다. 내가 경계선지능이라니. 멀쩡하게 잘 살아왔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몸에 커다란 암덩어리가 발견됐을 때 느꼈을 충격과 비한다면 당찮을 비약일까. 어제까지 정상적으로 잘 살아왔던 내게 내 지능이 돌고래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나.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고 충격을 넘어   두려움까지 느껴졌다. 앞이 캄캄했다. 막막했다.


   그렇게 판정을 받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낯선 개념인 경계선 지능을 검색해보기 시작했다. 다들 자신이 경계선 지능인지 물었다. 어려서부터 또래보다 학습이 늦거나 왕따의 대상이 되고, 성인이 돼서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정한 직장이나 알바를 지속할 수 없는, 다 내가 겪어왔고 지니고 있는 특징들이었다.


  흩어져있던 퍼즐들이 맞춰졌다. 지금까지 숱하게 알바를 두 달도 못 가고 관뒀던 것, 어느 일을 하든 적응을 못하고 첫날부터 늘 울었던 기억, 어린 시절 오랫동안 왕따를 당했던 트라우마. 학습부진아반을 전전했고 학창 시절 학업 성적이 열심히 준비해도 바닥이었던 이유는 내 지능이 낮아서였다. 지능이 낮아서. 내 지능이 낮다니 이럴 수가. 곱씹을수록 소화되지 못하고 얹힌 체증. 충격과 절망.


  밤늦게까지 검색하며 많이 울었다. 커뮤니티 사이트 사이에서 경계선 지능썰을 읽으며 조롱 댓글이 달리는 걸 읽었고 자신의 아이가 경계선 지능이라며 교육정보를 절실하게 공유하는 부모들의 글을 읽으며 나는 자식을 낳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인터넷 글을 읽으며 나 같은 사람을 지칭해 유사 인류라고 말하기도 하는 걸 읽으며 상처를 심하게 받았다. 인간의 평균 지능에 이르지 못하는 내 지능을 탓하며 나 같은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두려웠다. 우리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자조적인 경계선 지능의 글에 그럴 수 없다며 분노했다가 뒷목이 서늘해졌다. 그들의 암울한 글들, 그들의 예언처럼 평생을 비루하게 살다 죽을 것인가.


  경계선 지능 판정을 받은 날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로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경계선 지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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