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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아리 Jan 17. 2023

주홍글씨

잠식

  평생을 주홍글씨를 지닌 채 남들 앞에 섰던 헤스터 프린보다, 남몰래 가슴에 새긴 주홍글씨를 숨기고 목사로 살아갔던 딤즈데일에게 소설은 방점이 찍혀있다 생각한다. 차라리 앞에서 비난받더라도, 드러내면 떳떳하다. 하지만 숨기게 될 때, 그것이 평생의 단위로 숨겨야 할 때면, 고통은 배로 쌓여 나의 내부를 잠식한다. 잠식. 조금씩 조금씩, 자신이 숨겼던 거짓은 내부를 침략하여 먹어 들어간다. 종내에는 누에가 뽕잎을 뜯어먹는 것처럼 내 자아마저 다 갉아먹어버린다. 거짓의 말로는 그렇다. 앞에서는 그럴듯함이 유지되지만 내부에는 수없는 균열이 가고 마침내는 지반 자체가 붕괴되고 마는 것이다. 붕괴된 뒤에는 되돌릴 수 없다.

  

  경계선 지능이란 사실은 살갗에 지져진 화인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평생의 주홍글씨이며 딤즈데일을 죽어가게 했던 것처럼 나를 불안으로 말라붙게 했다.


  남자친구에게 경계선 지능을 숨긴 지 몇 개월이 되어간다. 첫 만남부터 숨겼다. 경계선 지능이란 사실을 알렸다면 남자친구는 내 남자친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경계선 지능을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 남자친구가 반했던 여자는 사실 지적으로 문제가 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일반인은 몇이나 될까. 아마 내가 일반인이었어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결혼까지 전제한 만남이면 더 그렇다.


  남자친구에게 숨기고 남자친구 부모님에게 숨겼다. 안단테 카페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하면 할수록 나는 불안에 사로잡히고 더 그들을 기만해야 했다. 남들은 그냥 일반인으로 존재했지만 나는 일반인이 되기 위해 수많은 억지와 작위로 자신을 꾸며야 했다. 나는 일반인으로 그냥 존재하지 못하니까.


  남자친구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마다 의심이 피어났다. 뭘 보고 나를 사랑하는 건지, 그가 보는 나는 내 전부도 아닐뿐더러 내가 경계선 지능이라는 걸 알아도 날 사랑한다 말할 수 있을까.

  아마 내가 경계선 지능이라는 사실을 알면 당장 그것에 대해 알려들겠지. 검색을 해보고 치를 떨겠지. 인터넷에 수많이 올라와 있는 괴담 수준의 게시글을 읽으며 그 특징들에 나를 끼워 맞추기 시작하겠지. 경지라는 걸 알지 못했던, 함께했던 일상들을 곱씹으며, 예전이라면 예사롭게 넘겼던 사소한 일들에서 경지의 조짐을 찾아내고 나를 다른 방식으로 재단하기 시작하겠지. 자기랑 애초에 급이 맞지도 않았던 여자. 내가 뭐가 부족해서 이런 여자랑 이 세월을 만났던 것인가. 기만당했다는 생각이 들겠지. 그리고 이별을 고하며 내게 상처를 주겠지. 이런 애인줄 모르고 만났다고. 마침내는 이 사랑의 끝이 연인과 연인이 아닌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로 성립되겠지. 인터넷에서 봤던, 내 여친이 경계선 지능이었다는 썰들에서 헤어지라고 했던 수많은 목소리들. 내게는 치욕이 되고 상처로 남을 거다.

 

  거금의 수표는 오물이 묻어있어도 그 가치가 훼손되지 않는다 했다. 당장 내 수중에 돈이 없을 때, 배설물이 묻어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10만 원, 어쩌면 그것보다 훨씬 높은 금액의 수표를 가지려 할 것이다. 그러나 내 가치는 그것과 반대이다. 아무리 외연을 그럴듯하게 유지하더라도 경계선 지능이라는 정체성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5백 원짜리 동전이 아무리 고급 포장지에 싸여있어도 그 가치가 오만 원이 되지 않듯이.

 

  나는 내가 왜 이렇게 태어난 것일까 하고 자책하지 않는다. 그 자체도 수치스럽다. 경계선 지능은 경계선 지능일 뿐이다. 남들은 지적장애와 경계선 지능을 구분하지 못할 것이고 인터넷에 발행된 자극적인 게시글들을 보며 그 편견을 더욱 공고히 할 것이다. 실제로 경계선 지능인들 중, 자신이 경계선 지능인이라는 걸 담담히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아마 자신이 경계선 지능이라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 쪽이라는 게 맞겠지. 하지만 나처럼 괴로워하고 부정하는 쪽도 있다. 자신은 일반인과 다르지 않다고 필사적으로 자기 증명을 해내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경계선 지능에 대한 편견과 함부로 특정지어진 특징들은 모욕으로 다가온다. 그들에게 경계선 지능은 숨길수만 있다면 숨기고 없애고 싶다면 없애고 싶은 인생의 깊은 멍에일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자신이 경계선 지능이라는 인식은 강해질 뿐이다.


  딤즈데일 목사가 평생을 짊어지다 죽어갔던 십자가, 죄. 경계선 지능이란 '타고난 특질'이 죄와 동일시되어 숨겨야 하는 현실. 밝혀지면 비난받아야 하는 부정하고 불온한 것이 되어버린 이 특질이 모종의 악에 기반한 저주라는 생각마저 든다. 진정한 사랑이 찾아와 마법을 풀어주기 전까지는 끔찍한 괴물로 살아가야 하는 괴물처럼 나도 그런 것일까. 하지만 동화와 현실은 다르다. 현실은 약속된 희망이 없다. 현실에서는 진정한 사랑이란 성립되기 힘들다.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인간이다. 나와 같은 정체? 인 모든 이들도, 잔인한 말이지만 쉽게 사랑받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모욕을 타고났다. 매 시간, 매 순간이 모욕으로 다가온다. 쉽게 모욕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일반 사회에 편입해야 한다. 남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이 주홍글씨를 더 깊숙이 숨기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더라도, 이 타고난 약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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