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서로 첫인상은 별로였죠
"너 영어 점수 몇 점이야?"
제가 기억하는 저희의 첫 대화는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아마 기말고사가 끝나고 가채점을 하던 때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평소 이름만 알았던 다른 반 애가 대뜸 와서 하는 말이 영어 점수 몇 점이 나니, 애는 뭔가 싶어 꽤 당황했었죠. 예상 점수를 말해주었더니 당신은 흡족한 얼굴로 '자신이 이겼다'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돌아갔죠. 어이없기도 했지만 초면에 저렇게 물을 수 있는 용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많이 소심했으니까요.
친구들에게 물어본 당신은 꽤 유명했습니다. 강남에서 공부한 소위 말하는 '엄친아'. 성적에 대한 관심이 크고 승부욕도 강한, 당신은 제가 시골에서 소문으로만 듣고 상상했던, 서울 학생의 이미지를 전부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변 눈치 안 보고 마이페이스로 행동하는 자신의 행동의 자신감 넘치는 캐릭터. '만화 속에만 있는 건 줄 알았는데 현실 속에서도 정말 저런 사람들이 있구나.' 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두 번째 대화에서 당신은 저를 '거짓말쟁'이라고 불렀습니다. 배점 문제로 제가 더 높은 성적을 받아 어쩌다 보니 해당 학기에 성적 우수자가 돼버렸기 때문이었죠. 시험지를 들고 와 분해하던 당신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저는 몇 번이고 아닌 줄 알았다고 해명했죠.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제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진땀 흘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웃음)
지인들을 만나면 종종 저희 둘이 처음에 어떻게 만났는지 묻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저는 지금 이야기를 합니다. 주변에서 장난스럽게 당신이 너무했다고 해주면, 당신은 멋쩍어하면서도 그때는 자신이 1등일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속상했다며, 제가 거짓말을 했다고 장난스럽게 투덜대곤 했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제 점수에 확신이 없었을 뿐입니다. 괜히 높게 말했다가 틀리면 창피하잖아요.
그래도 지금은 꽤 만족스럽습니다. 어쨌든 제가 당신을 '영어'로 이긴 몇 안 되는 순간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