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위대한가

기억력의 위대함

by Nam


‘기억력이 있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진정 위대함은 잊는 데 있다.’ E. 허버드의 말이다. 나는 잘 잊어버린다. 그러나 결코 위대하지는 않다. 좋은 기억은 오랫동안 간직하면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슬픈 일이나 부정적인 사건은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E. 허버드가 말한 잊는 것의 위대함 역시 기억해서 좋을 것이 없는 경우를 가리킨다. 즉, 돌이킬 수 없는 실수나 후회를 기억하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잊고 사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다시 생각해 보니 나의 잊어버림도 나름 괜찮은 것 같다.

퇴근하고 오는 길에 슈퍼 앞에 진열되어 있는 귤을 보았다. 귤을 보자마자 불현듯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대학생 때 자취하던 곳 근처에 슈퍼마켓이 있었다. 과일을 딱히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고, 학생 때는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아 과일을 자주 사 먹지 않았다. 다만, 겨울에는 많이 먹었다. 가격도 저렴하고 입이 심심할 때 제법 유용했기 때문이다. 그날도 집 근처 슈퍼마켓으로 장을 보러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에는 귤을 살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빨간 바구니 안에 한가득 담겨 있는 귤을 보니 왠지 모르게 사야 할 것 같았다. 30개에 5천 원. 바구니 안에 담겨 있는 귤을 내가 직접 비닐봉지에 담아 계산대로 가져가는 방식이었다. 앞으로의 일이 어느 정도 예상이 되는가? 그렇다. 나는 주인이 직접 세 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귤을 31개 담았다. 아니 32개였다.


귤이 담긴 비닐봉지를 카운터에 가져가 자신 있게 내밀었다. 그런데 주인은 비닐봉지를 받자마자 거꾸로 들고 귤을 다 쏟아냈다. 그러더니 하나하나 세기 시작했다. 그 순간, 창피함을 넘어 아찔했다. 31개였다면 ‘실수로 하나 더 담았겠지’라고 주인이 생각해 주길 바랐을 거다. 나 역시 스스로를 위해 그렇게 합리화했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32개였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주인은 말없이 귤 2개를 꺼내 도로 바구니 안에 담았다. 나는 죄송하다는 말도 못 한 채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 일을 10년 동안 잊고 살았다. 마치 내 인생에 없었던 사건처럼. 그런데 10년이 지난 어느 날 귤을 보니 그날이 갑자기 떠올랐다. 나는 이것을 잊고 살아온 것이다.


E. 허버드는 날 위대하다고 평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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