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비나 Aug 11. 2022

실수로 한밤중에 손님을 내쫓아버렸다

호스텔 생활 최악의 실수

트레이닝 3일 차, 나처럼 집 떠나 여행하며 살고 있는 아르헨티나 소녀와 함께 근무를 섰다. 오후 5시부터 밤 10시까지 처음으로 밤 시간대 근무를 하게 됐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이 도시로 오는 여행객이 많아서 인 지 저녁 늦은 시간에 체크인이 많았다. 그렇다고 자리에 앉을 새 없이 분주한 건 아니었다. 여전히 대부분의 근무 시간엔 책을 읽거나 공부를 했다.




사건은 마감 시간인 밤 10시가 다 돼 가서 벌어졌다. 사실 그동안의 호스텔 생활로 나름 리셉션 일이 손에 익은 상태였기에 트레이닝 기간이긴 하지만 나는 한껏 여유로웠다. 혼자서 손님을 안내하기도 했다. 별 문제없었다. 그러다 마무리 정리를 하기 위해 이리저리 분주하던 무렵, 아르헨티나 소녀가 스페인어를 못하는 손님 체크인을 도와 달라고 했을 때였다. 서둘러 주방에서 리셉션으로 달려가 보니 딱 봐도 유럽 사람처럼 생긴 남성 둘이 서 있었다. 50리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배낭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술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짐도 풀지 않은 채 파티를 다녀온 모양이었다.


자기네 여행사에서 이곳에 숙소를 예약했다고 했다. 뭐라 뭐라 그 여행사 이름을 대는데 무슨 말인 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때 나는 오늘 체크인을 하지 않은 예약자들 이름을 하나하나씩 다 불렀어야 했다. 나도 모르겠다. 왜 그 순간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대신 나는 예약 관리 프로그램 화면을 그들에게 보여줬다. 여기서 당신네 여행사 이름을 찾아보라고. 한참 모니터를 쳐다보던 그 청년들은 오늘이 아닌 다른 날짜에 예약되어 있는 이름을 가리켰다. 그 여행사가 자기네 방을 오늘 날짜로도 예약했다고 했다. 그 때라도 바로 전체 명단을 다 훑었어야 했다. 하지만 무엇에 홀렸는지 그 생각조차 못했다. 그들이 가리킨 이름과 동일한 예약자가 있는 지만 확인하고 말았던 것이다. 난 예약된 방이 없다고 말해버렸다. 별생각 없이.


심지어 그날 모든 방이 예약으로 가득 차 빈 방도 없었다. 그들이 지금 남은 방이 있냐고 물었을 때도, 오늘 잘 곳이 없다며 당황한 표정을 지을 때도, 난 친절하게 그들을 동정할 뿐 칼같이 우리 호스텔엔 자리가 없다고 했다. 내 옆을 지키던 아르헨티나 소녀도 별 말하지 않았다.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서 일까. 그 순간 내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누구도 ‘여기 이 예약자가 저 사람들 그룹 아니야?’라고 짚어줄 사람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내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다. 왜 그들이 그 큰 배낭을 다시 메고 밤길을 나섰을 때까지도 예약 프로그램 화면을 다시 꼼꼼히 살피지 않았을까. 심지어 ‘친절하게도’ 그들에게 지금 이 시간에 묵을 수 있는 근처의 다른 숙소 위치도 알려줬다. 술에 취해서인지 아니면 천성이 착한 사람들인지 짜증 한번 내지 않고 그렇게 그들은 호스텔을 떠났다.


그때 아르헨티나 소녀가 중얼거렸다. 이미 숙박비 전체를 다 지불하고 예약을 한 그룹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순간 몸이 굳었다. 얼른 모니터 앞으로 달려가 그 그룹의 이름을 확인했다. 이미 떠나버리고 없는 그 유럽 청년들이 처음에 말했던 이름과 비슷한 발음의 단어였다. 부킹닷컴이나 호스텔월드 같은 예약 사이트를 이용하지 않고 직접 호스텔에 들러 방을 잡고 간 모양이었다. 청년들이 짚었던 예약자의 이름과 동일하진 않았다. 그래도 내 본능은 말하고 있었다. 이들이라고. 아르헨티나 소녀도 정황을 들어보더니 내 생각에 동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증도 나왔다. 그 두 사람이 가리킨 이름을 눌러 전체 예약 정보를 보니 오늘자로 예약돼 있던 그룹 이름과 동일한 단어가 적혀 있는 것이었다.


배낭을 짊어지고 있던 것으로 보아 다른 도시에서 혹은 자기네 나라에서 처음 과테말라에 도착한 것이 틀림없다. 게다가 술까지 취해 말짱한 정신이 아니었던 사람들을, 그것도 한 밤 중에, 내가 손수 거리로 내쫓은 것이었다. 호스텔 생활 최악의 실수였다. 당장 매니저에게 보고를 하자, 심지어 그 여행사는 이 호스텔의 중요한 고객이라고 했다. 정기적으로 단체 예약을 하는 모양이었다.




앞이 깜깜했다. 가슴이 조여왔고, 식은땀이 났다. 잠시 잊고 있었던 불안 장애 증상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나쁜 습관도 반복됐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온갖 일을 나는 상상하기 시작했다. ‘아직 트레이닝 기간이니 분명 쫓겨날 거다. 또다시 짐을 싸야 한다. 어디로 떠날지 또 고민해야 한다. 길거리로 내쫓긴 손님들이 다시 찾아와 내게 분풀이를 할 것이다. 아니면 중요한 고객의 신임을 잃은 데 화가 난 매니저가 날 나무랄 것이다. 고객이 이미 지불한 숙박비를 물어줘야 할 것이다. 등등. 근무가 끝나고 침대에 돌아와서도 상상은 끊이지 않았다. 몸 전체가 불안에 떨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한편으론 귀가 아직도 호스텔 출입문으로 가 있었다. 혹시 떠난 이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책에서 본 ‘마음 챙김’ 방법을 열심히 반복하며 내일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내가 손 쓸 수 있는 것은 없으므로.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끔찍했다.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회피 습관의 회귀였다. 나는 호스텔 직원들과 아침 인사를 나누는 데도 뭔가 모르게 주눅 들었다. 큰 사고를 치고도 멀쩡히 웃고 다녀도 되는지 걱정됐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고, 이 일도 결국엔 하나의 해프닝으로 다 지나갈 것이란 걸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질적인 불안을 안고사는 내겐 여전히 자연스레 소화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호스텔리어로 자질이 있는지까지 고민했다.


다행히도 오전이 되자 모든 일이 순탄히 흘러갔다. 내가 저질러 버린 일은 호스텔 측에서 고객에게 무료 아침 식사를 제공하는 것으로 적절히 합의가 됐다. 고맙게도 매니저는 앞으론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해줄 뿐 감정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 심지어 체크인 할 때 제대로 된 가이드도 없이 무작정 숙소로 보내는 여행사의 잘못이 크다고 했다. 나보다 나이는 한참 어린 매니저지만 그녀가 성숙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렇게 내 온몸을 긴장으로 뒤덮고, ‘대체 왜 그랬을까’ 자책하던 순간들이 가볍게 날아갔다. 마음을 짓눌렀던 돌덩이도 던져버렸다. 운이 좋게도 내가 상상했던 최악의 일, 이 호스텔을 떠나야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심적으론 그랬다. 하지만 앞으로도 호스텔리어로서 삶을 이어가야 하기에 이번 일을 그저 행운이라 여기고 흘려보낼 순 없었다. 예약 시스템이 오류가 날 확률보다 인간인 내가 실수를 저지를 확률이 높다. 제 아무리 손님 본인이 직접 예약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예약했다고 누군가가 찾아왔을 때 실제로 예약이 안 돼 있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다. 심지어 내가 컴퓨터상으로 예약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해도 말이다. 절대로 무작정 손님을 길거리로 내쫓지 말아야 한다. 시간을 갖고 충분히 모든 사항을 점검하고, 매니저에게도 확인을 해 본 후 결정해야 한다. 



호스텔리어로서 업무를 떠나서 같은 여행자끼리 너무 매몰찼던 내 모습이 믿기지 않는다. 매일 새로운 사람이 오고 가는 이곳, 내일은 또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일을 저지를 까 걱정되면서도 설렌다. 이게 바로 내가 호스텔리어의 매력에 빠져버린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이전 09화 손님이 내게 맡긴 여권이 사라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