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여권 실종 사건
나는 아침 8시가 넘도록 침대를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니, 밖으로 나오기가 싫었다. 오전 근무가 아닌 날에는 꼭 아침 달리기를 하겠다는 의지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내 몸이 다가올 사건을 먼저 감지하고 나를 보호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겨우 몸을 일으켜 화장실에서 정신을 차리고 나오는데 잔뜩 굳은 얼굴의 이스라엘 남성이 다가왔다.
“굿모닝!”
아무렇지 않게 인사할 분위기가 아니라는 걸 감지했지만 딱히 그에게 건넬 말이 없었다. 가까이서 보니 뭔가에 단단히 화가 난 게 틀림없었다. 오전 근무를 서는 동료가 그 남성을 뒤따라오는 걸 보고선 난 확신할 수 있었다. 잘못됐다. 무언가가.
"사비나, 심각한 일이 터졌어. 나 지금 셔틀 타야 하는데 내 여권이 사라졌어."
나는 그 손님과 나름 통성명도 하고 친분을 쌓은 상태였다. 유독 그는 붙임성이 좋은 성격이었고 계속 숙박을 연장하며 꽤 오랜 기간 숙소에 머무르고 있었다. 항상 능글맞게 웃음 띈 얼굴로 말을 걸어오던 그가, 전혀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이 호스텔에선 손님이 수건을 빌리기 위해 자신의 여권을 리셉션에 맡겨 놔야 한다. 수건을 깨끗하게 쓰고 돌려줬을 때 여권을 찾아갈 수 있다. 여권이 보증 물품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매니저에 따르면 이는 그간 주인 의식 없는 몰상식한 손님들 때문에 내린 극단의 조치라고 한다. 새하얀 수건에 음식물 소스, 핏자국을 잔뜩 남겨 놓거나, 수건을 되돌려주지 않고 그냥 가지고 떠나버리는 경우가 흔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쉽게 갱신할 수 있는 운전면허증이나 신용카드 등을 맡겨 놓고 수건과 함께 사라지는 경우도 많았단다.
나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며칠 전 그가 수건을 빌려 달라고 했을 때 그의 여권을 받아 챙겼던 것을. 운전면허증은 안되냐고 물었을 때도 단호하게 ‘여권’만 된다고 선을 그어버렸던 내 모습을. 교육받았던 매뉴얼 그대로였다. 나는 그에게 카운터 돈 상자에 여권을 같이 넣어 놓으니 걱정하지 말라고까지 했다. 근데 그 여권이, 오늘 사라졌다.
"정확히 ‘너’한테 여권을 줬어."
상황 파악을 위해 여러 가지를 점검하던 내 동료의 질문에 그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렇게 대답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들었을 뿐이었지만 참 뼈아픈 한 마디였다. 나는 당황해서 기억이 나지 않는 척을 해버렸다. 의미 없는 행동이었지만 여권이 있어야 할 그 자리를 다시 뒤적였다. 리셉션에 쌓여 있던 물건도 괜히 이리저리 치워가며 분주히 움직였다. 내게 맡긴, 다른 것도 아닌 여행자의 심장인 여권이 사라졌는데 멍하니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의 여권을 받았을 때 사실 갑자기 밀려온 체크인 손님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관련 에피소드는 아래의 링크 참조). 하지만 아무리 대기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고 해도 내가 그 소중한 여권을 들고, 아니 아무 데나 내려다 놓고 돌아다녔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나 자신을 믿고 싶었다. 여행자로서 여권을 남에게 맡긴다는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손님의 여권을 다룰 때마다 나는 더 신경을 기울였다. 여권을 되돌려줄 때도 마찬가지로 꼭 손님에게 여권 첫 장의 사진을 확인시켰다. 그런 노력이 단 며칠 만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아무 진척 없이 시간이 흐르자, 나는 그냥 이 사건이 단순 내 실수였으면 했다. 어쩌다 내가 그의 여권을 내 가방에 넣었거나 옷 주머니에 두고 깜빡한 게 틀림없다고. 어이없이 내 물건 주변에서 튀어나올 거라고. 리셉션에 멀뚱히 서 있기도 뭐 해서 방으로 돌아가 내 침대와 옷가지를 뒤졌다. 제발 그렇게 해서라도 그의 여권이 무사히 눈앞에 나타나기를 바랐다.
당연히 내 방에선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리셉션으로 돌아오는 데 문득 나의 또 다른 실수를 깨달았다. 내가 아직 그에게 사과의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권을 건네던 순간만큼은 그는 ‘나를’ 믿고 있었다. 과정이 어찌 됐든 그의 여권이 없어졌고 내가 그의 신의를 져버렸다. 다른 도시로 가야 할 버스를 타야 하는 시점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한 그에게 내가 인간적인 사과도 하지 않았다니. 그런 나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바로 나는 모든 진심과 미안한 감정을 담아 그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미안해하지 말고 일단 우리 같이 여권을 찾을 방법이나 찾자.”
나는 신경질적인 대답이나 분노도 다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는데 그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침착했고 이성적이었다. 젊은 이스라엘 청년의 성숙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난 일을 후회하고 미안해할 시간에 당장 그의 여권을 찾는 데 집중하는 게 진짜 그를 위한 일이었다. 그때 직원 그룹 채팅방에 전날 밤 근무를 섰던 동료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와 비슷한 인상의 한 이스라엘 남성에게 그녀가 여권을 돌려줬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매니저가 바로 리셉션 감시카메라를 돌려보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디오 하나가 채팅방에 올라왔다.
영상 안에는 어떤 남자가 리셉션에서 여권을 건네받고 그게 자신의 것인 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바로 자리를 뜨고 있었다. 그 손님에게 여권을 주기 전에 동료가 여권 이름을 확인하는 장면도 포착됐다. 하지만 정황상 그가 남의 여권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고 그대로 들고 가 버린 게 틀림없었다. 동료가 말한 대로, 그 영상 속 남성은 내 눈앞에 서 있는 실제 여권 주인과 인상착의가 매우 유사했다. 채팅방에 동료들은 그 둘이 동일 인물인지 다른 사람인 지도 구분하기 힘들었다. 결국 여권을 잃어버린 그 남자가 직접 영상을 확인했다.
“어, 나 이 사람 누군지 알아!!!”
순간 청년의 얼굴에서 희망이 피어오른 듯했다. 그는 영상 속 사람의 이름도 안다고 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이름과 철자 하나 차이나는, 발음이 매우 유사한 히브리어 이름이었다. 듣는 외국인의 입장에선 충분히 같은 것으로 착각할 만한 이름이었다. 게다가 그 둘은 똑같이 금발에다 키가 큰 마른 체형이었다. 모든 정황이 사건의 전말을 정확히 그려내고 있었다. 어느새 리셉션에 모인 사람들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맴돌았다. 하지만 완벽한 해피엔딩이 바로 이어질 순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잘못된 여권을 가져간 남성이 그날 아침 화산 트레킹 투어를 떠나고 숙소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가 숙소에 짐을 맡겨두고 떠났기 때문에 트레킹이 끝나면 이곳으로 돌아 올 터였다. 다음날이면 여권이 무사히 진짜 주인을 찾아갈 수 있게 됐다.
업무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그 실수를 저지른 직원을 탓하는 대신 실수를 하게끔 만들어진 업무 절차를 다시 살펴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다른 이의 여권을 건넨 직원의 부주의함만 나무랄 것이 아니다. 애초에 그 중요한 여권을 보관하면서도 제대로 된 관리 절차를 만들지 않은 매니징의 문제가 크다. 호스텔은 리셉션에 있는 여권의 개수만 체크했을 뿐, 누구의 여권을 가지고 있는지 관심 가지지 않았다. 언제 누가 여권을 찾아가는 지도 기록해두지 않았다. 호스텔의 재산, 수건이 되돌아오는지 여부만 신경 썼을 뿐 정작 손님의 소유물은 등한시했던 것이다.
한 달 후면 떠날 volunteer의 자격으로 내가 이 호스텔의 시스템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는 없다. 하지만 내 근무 시간에서 만큼은, 앞으로 내가 주고받는 여권의 기록을 상세히 남길 것이다. 세부 업무가 늘어나는 것이다 보니 귀찮기는 하겠지만, 그 대상이 손님의 ‘여권’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상황을 바꿔 생각해, 호스텔 측의 잘못으로 내 여권이 없어졌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무리 지금은 한 호스텔의 직원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내 본분은 여행자다. 이번 여권 실종 사건으로 여행자 입장에서 호스텔 업무를 바라보고 절차를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관련 포스팅] :
https://brunch.co.kr/@a5bf41353dfd47c/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