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27] 어린 시절 추석의 기억

돌아올 수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

by 명경

내 어린 시절 추석은 따듯하다 못해 뜨거운 아랫목에서 시작되었다. 항상 연휴 전날 학교를 마치면 귀성길에 오르곤 했는데, 우리 집은 강릉이었고 할머니 댁은 논산이었다. 그때는 강릉에서 내륙으로 나오려면 대관령을 구불구불 운전해서 넘어야 하던 시절이었다. 험한 길과 밀리던 귀성길을 해쳐 할머니 댁을 도착하면, 늦은 저녁일 때가 많았다. 차가운 밤공기에 시골, 지금보다는 추웠던 가을 할머니 집에 도착하면 뜨거운 아랫목은 막 도착한 우리 차지가 되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큰아버지께 큰절을 올리고, 먼저 온 친척들과 반갑게 인사하곤 차가운 몸을 따뜻하게 녹일 때의 느낌은 지금은 느낄 수 없는 그리움 중 하나이다.

늦은 저녁을 먹으면 사방이 캄캄해진다. 논과 밭이 넓게 펼쳐진 충청도의 들판에는 그저 어두운 길을 밝혀주는 가로등 몇 개 만이 서있을 뿐이었다. 어른들이 졸리다고 TV와 형광등 불을 끄면, 스마트 폰도 없던 우리는 잠에 들 수밖에 없었다. 잠을 자다 오줌이라도 마려워 깨면 정말 다행이지, 큰 볼일이 마려우면 정말 큰 일이었다. 화장실이 집 밖으로 나서 20미터 정도는 가야 있는 지라, 어린 나로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소변이야 대청마루 구석으로 가서 바깥으로 냅다 보거나, 눈 딱 감고 요강에다 일을 치르면 되었지만, 큰 볼일은 어둠을 뚫고 화장실로 갈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낮에도 화장실은 무서웠다. 도시의 어린아이에겐 시골의 푸세식 화장실의 바닥은 빠지면 해어 나올 수 없는 무저갱 같았고, 고약한 냄새와 이리저리 쳐진 거미줄과 파리와 벌레들 또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전까지는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하고 신문지 위에서 볼 일을 처리했던 기억이 난다.

어린이들에게 시골은 즐거움도 참 많이 주는 공간이었다. 광주리 안에 과일들과 새로운 어른들이 오실 때마다 사 오는 과자선물세트는 우리 어린이들에게는 기쁨이었다. 거기에 더해서 쿰쿰한 냄새라기엔 그저 불쾌하지만은 않던 냄새가 나던 여닫이식 벽장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선사하는 요술의 문이었다. 그 안에는 사랑방 손님이라는 이름의 동그란 사탕부터 먹고 남은 과자나 가지고 놀 수 있는 잡동사니처럼 어린 우리에게 흥미가 될만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친척들이 다 모이면 우리는 논을 뛰어다니거나 동네 여기저기를 모험하며 놀았다. 할아버지 자전거 뒤를 돌아가면서 타기도 하고, 오토바이를 태워주는 어른을 만나면 횡재하는 날이었다. 자전거나 오토바이 뒷좌석에 앉아 느끼는 시골바람내음은 아주 청량한 느낌을 선사했다.

추석 당일 날 할머니가 주신 맨질맨질한 새양말, 이른 차례를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씻으려 동동거리며 기다리던 순간, 대청마루에 다 같이 서서 차례를 하던 순간, 이후에 왁자지껄한 아침 식사까지 이젠 그저 추억 속의 한 장면일 뿐이다.

어느 날부터일까, 명절 때 그리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 않게 된 것이, 할아버지가 병환에 드시고 병시중 들기에 용이한 시내 아파트로 이사를 간 다음부터였을까. 아니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작은 할아버님들이 거동하기 불편하면서부터였을까. 우리 연배의 사촌들도 나이가 들어 하나둘 결혼을 하고 자녀가 생기고 삶에 여유가 없어지면서 한자리에 모이는 일이 힘든 일이 되었다. 나도 왕왕 명절 때 이런저런 핑계로 못 가는 경우가 생긴다.

눈을 감고 그 따뜻했던 장면들을 떠올리면 그리움이 몰려온다. 다시 느낄 수 없도 돌아오지도 않을 장면이기에 왠지 모를 울컥함이 느껴진다. 그 시절에 명절 때만 느낄 수 있었던 특별한 경험이 그리운 것인지, 이제는 점점 나를 떠나가 버리는 사람들이 그리운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몇십 년이 지난 지금 떠올려도 이런 장면들이 내 머릿속에서 생동하고 잊히지 않는 것은 그 시절 아랫목의 온기처럼 나를 향해 주었던 그들의 따뜻함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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