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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영어 공부

by blanca

“익스큐즈미”

그가 서진 건너편의 비어있는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서진은 잠깐 갈등했다. 누군가를 위해 맡아놓은 자리라고 말할까 싶었지만, 그에게 그런 거짓말은 금세 들통날 것만 같았다. 그가 서진의 머뭇거림을 승낙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의자를 끌어내어 건너편에 바로 앉았다.


서진은 그의 등장에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려 휴대폰으로 보고 있었던 드라마를 다시 재생시켰다. 실상은 극도의 긴장으로 손안에 땀이 배어나오고 입안의 침이 바싹바싹 말랐다. 긴장한 나머지 블루투스 이어폰 연결을 깜빡하여, <길모어 걸스>의 그 속사포 같은 로렐라이의 대사가 사방으로 크게 튀어나오자, 경찰이 황당하다는 듯 큭큭 소리 내어 웃었다.


“너 지금 드라마 보면서 뭘 쓰는 거야? 대사들을 이렇게 다 적는 이유가 뭐야?”

날카로운 첫인상과는 달리 웃을 때는 유순해 보였다. 서진은 대답 대신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가 잠시 서진의 노트를 봐도 되겠냐고 묻는 것과 동시에 카운터에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한번 들으면 바로 잊어버릴 평범한 이름, 로버트였다. 서진은 로버트에게 노트를 건넸다. 로버트가 노트를 앞뒤로 휘리릭 넘겨 봤다. 미국 드라마 쉐도잉 노트였다. 미국에 와서 서진은 미국 드라마를 영어 자막으로 보며 기억하고 싶은 표현들을 노트에 일일이 다 적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국에서도 할 수 있는 이런 방식이 아니라 현지인들과 매일매일 스몰토크를 하며 실용영어 실력을 늘리고 싶었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더듬더듬 부정확한 발음으로 하는 서진의 영어를 인내심 있게 들어주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평상시와 달리 킴벌리가 그의 음료를 직접 테이블 위에 두고 가며, 서진에게 커피 리필을 원하냐고 친근하게 물었다. 서진은 그 리필이 공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 순간, 킴벌리에게 진한 고마움을 느꼈다. 킴벌리의 작은 배려가 여기 지금 이렇게 홀로 앉아 있는 서진을 덜 겸연쩍게 만들었다. 이 모든 일련의 일들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마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바깥에서 구경하며 직접 들어가 보고 싶었던 집안에 마침내 발을 들여놓은 것처럼 서진은 뿌듯했다.


“영어 공부하는 거구나.”

로버트가 노트를 덮으며 판정이라도 내리듯 말하자 서진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버트의 콧잔등에 세로 주름이 내천자 모양으로 잡혔다. 나중에 서진은 로버트의 이 주름이 뭔가를 집중해서 바라보거나 골똘히 생각에 잠길 때마다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렇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나랑 영어로 이야기하는 게 낫겠다. 그게 네 영어 실력 향상에 더 효과적일 거야. 내가 스페인어를 공부해 봐서 알아. 언어는 절대 혼자서는 안 돼. 넌 어떻게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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