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마시러 삼만리, 당일치기 부산

오늘은 no 차!

by 호진 Hojin
'세월이 주는 맛'


내가 누군가에게 '노차'가 무슨 맛인지를 설명할 때 꼭 붙이는 말이다. 노차라고 하면 보통은 30~40년 즈음된 차들을 이야기한다. 지금 기준에서 노차라면 약 80년이나 90년대에 생산되어 현재까지 보관되고 있는 차라고 할 수 있겠다.


차의 맛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제다가 끝난 뒤에도 시간이 지나며, 외부 환경과의 접촉에서 눈에 보이는 색깔부터 풍미까지 점차로 바뀌어 간다. 때로는 기대 이상으로 뛰어난 맛으로 바뀌고, 어떤 빈티지는 전설이 되기도 한다. 그런 세월이 주는 맛이 정말 뛰어난, 특정 연도에 생산된 특정 빈티지 차들은 때론 차 한 편, 330그램 남짓에 천만 원을 훌쩍 넘기도 한다.


나는 노차를 아주 즐겨 마시는 편은 아니다. 비싸기도 하고, 노차라서 맛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노차 중에 맛있는 노차가 있다는 것이지, 훌륭한 노차는 분명 존재하지만, 그만큼 가짜도 많고 진위를 가려내기 어렵다. 그래서 내 노차 생활은, 취향에 맞는 몇 편을 들고 가끔 별식처럼 꺼내 마시는 정도다.


부산으로


지금이야 그렇게 노차에 대한 궁금증이 어느 정도 정리된 편이지만, 옛날에는 정말 궁금해 미치는 장르였다. 비싸고 구하기도 힘든데, 진품인지도 모르니, 경험 없는 사람으로서 쉽사리 사지는 못하겠고

주변 이야기나 인터넷, 서적들을 보면 무협지 같은 묘사들이 난무하니, 대체 노차가 무엇이길래 이렇게 사람들이 열광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럴 때 제일 무서운 말이, 소위 '잘 안다'는 사람의 '내가 맛을 잘 아니, 확실한 물건으로 싸게 구해다 줄 테니 어때?'인데... 차 판에는 감사한 호의도 많지만, 대개는 99% 사기다. 무엇이든 제값을 주고 사는 게 편하다.


당시에는 이런저런 차들을 경험하기에 여력이 없을 때라, 좋은 노차를 싸게 구해주겠다는 혹하는 제안들도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X'라는 차였다. 보이차를 오래 드신 분들 중에서는 'X'라는 차는 꽤나 유명한 편이다. 가격도 비싸기도 비쌀뿐더러, 애초에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역설적으로, 가짜를 팔아도 검증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느 날 어떤 지인의 소개로, 좋은 가격에 X를 구해다주겠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가격이 가격이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당시에 차에 대해서 이것저것 많이 알려주시던 사람들에게 카톡으로 물어보았다. '이거 살까요?'


궁금하면 와서 마셔봐요. 우리 집에 있어요


그중 한 명에게 깜짝 놀랄 대답이 왔다.

진품 'X' 한번 마시는 다회가 있다고 하면 못해도 꽤 많은 값을 주어야 할 텐데, 이 차를 선뜻 내어주겠다고..??

학기 중이라 바빴지만, 이건 못 참았다.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곧장 KTX 표를 끊었다. 당일치기 부산행. 아침에 내려가 차만 마시고 저녁에 서울로 돌아오는 강행군이었다. 수업이었던가, 과제 모임이었던가 한번 빠지기까지 했지만, 여태까지 이름만 들어왔던 차를 마셔볼 수 있다는 생각에 두근두근한 마음이 앞섰다.


당일, 덜컹덜컹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 어떤 맛일지 상상을 해보기도 하고

부산역에서부터 또 부릉부릉 버스를 타고 도착한 다회 장소.


나를 초대해 주신 팽주를 포함해 4명이 한 테이블에 앉아, 몇 종류 차를 마시며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고 차품도 평해보고, 평소와 같은 다회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 이제 한번 슬 마셔볼까요. 호진님이 궁금하다고 한 그 차요'


드디어!!

검붉은 차탕에 깨끗하게 보관된 노차의 깊은 풍미가 향이 잔 위로 고요히 올라왔다.

입에 한 모금 머금고 꿀꺽하고 마시는 순간-


'응..? 이게 다인가..?'

싶은 당황스러운 감상이 들었다. 깨끗하고 잘 묵은 노차의 맛이긴 했지만, 무협지스러운 표현이 난사될 만큼의 감동은 아니었다. 확실히 맛있긴 맛있었지만, 예전에 마셨던 전율이 있었던 차들과 비견될 정도까진 아니었달까.


'어떠세요?'


이 차의 가격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던 터라, 쉽사리 '음~ 제 입맛에는 안 맞네요!'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이런저런 호평과 칭찬을 했지만 요지는 '내가 이 차의 가치를 알기에는 아직 공부가 모자란 것 같다'였다. 그러자 그분이 해주신 대답


'그냥 뭐 먹을만하죠?? 아마 기대하는 것보다는 덜한게 맞을거에요'(뜨끔했다)

'이것도 한번 먹어보시죠'


그다음에 나온 것은 시장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그런 차였다. 전설 같은 그런 차가 아니라.

그런데도 내 입맛엔 그다음에 나온 차가 더 맛있었다. 그 뒤에도 좋은 차들이 연달아 나왔지만, 마음 한편에는 계속 찝찝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덜컹덜컹 다시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내가 혀가 둔한 건지, 그 차가 가짜였던 건지(정말 실례되는 생각이었다) 여러 고민들로 몇 시간을 보내면서 서울로 허망한 발걸음을 옮겼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차는 절대 가짜가 아니었다.


그 뒤로도 여러 경험을 쌓아가며 알게 된 점이 있다. 노차든 무엇이든, 비싸거나 귀하다고 해서 반드시 더 맛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는 내가 왜 그 노차를 마시고 그런 감상이 들었는지, 설명도 할 수 있을 것 같다.(언젠가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지만)


결론


어떤 차가 귀하고 유명하다고 하여 '맛있어야 해'하고 마시면 대체로 맛있어진다. 반대로 ‘별 거 아니겠지’라는 마음이면 그냥 그렇게 느껴진다. 결국 믿을 건 내 취향과 혀뿐이다.


그래서 노차 맛있어요??

맛있는 노차는 맛있고,

맛없는 노차는 맛없고

그저 그런 노차도 많다


누군가 나에게 '노차'를 살지 물어본다면, 취향이 노차와 잘 맞으면 사고, 아니면 말자고 답하겠다. 내 취향은 노차보다는 요즘의 푸릇한 차들에 더 손이 간다. 살지 말지는 결국 취향과 지갑 사정의 교집합이다.


비가 오고 날이 서늘해지는 요즘, 따뜻한 노차나 숙차 한 잔이 자꾸 생각난다.

오늘은 오랜만에 옛날 차를 꺼내볼까 한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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