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자리에서 만난 빌런들 2

오늘의 차 : 24년 봄 대만야방수선

by 호진 Hojin
푸른 눈의 도사, 그리고 불맛


오늘의 차는 24년 봄 대만야방수선.


'야방'이란 말은 사람이 심었지만 거의 '야생'과 같은 환경에서 재배한 차를 말하고, 수선은 차 나무의 품종 이름이다. 그러니까 풀어내면 '24년 봄에 대만의 반야생 환경에서 재배한 수선 품종으로 만든 차' 정도?


160ml 즈음될 것 같은 자사호에 넉넉히 6g 정도를 넣고 열탕을 붓는다.

코 끝을 간질이는 달콤한 과일향과, 그 뒤를 따르는 고소한 곡물향


<아끼는 송단호에 덕화요 커피잔 조합. 차 맛을 잘 내어준다>


한 모금 입에 머금으니, 은은한 흰 꽃향과 복숭아 향, 그리고 곡물 볶은 향에 감칠맛과 약간의 짠맛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혀를 감싼다.

수선 품종으로 만들었지만 '철관음'이라는 차와 비슷하게 제다한(차를 만든다는 뜻) 탓일까.

수선스럽기도 하고, 철관음스럽기도 한.. 묘하게 양쪽을 다 닮은 독특한 매력이 있다.


꿀꺽하고 차를 삼키자, 목 뒤에서부터 시원한 허브처럼 기분 좋은 꽃향기와 숲 내음이 길게 이어진다.

혀 위에 남는 약간의 쓰고 떫은맛이 거슬리긴 하나, 참 좋은 차다


이 차도 시간이 좀 더 흘러 불 맛, 화기가 조금 사그라들면 좀 더 부드럽고 향기도 더 맛있어지겠지.


동양차, 특히 우롱차를 마신다면 '화기'라는 말을 꽤 자주 듣게 된다.

말 그대로 불기운이란 뜻이다.


차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불을 쓰는 과정(살청이나 탄배 등)에서 차의 향이 발현되는데,

만들어진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향이 차탕에서 조금 이질적으로 둥둥 뜨거나,

제작자가 의도한 향이 온전히 발현되지 않는 경우들이 있다.


그래서 시간을 조금 두고, 안정화가 된 다음 마시는 게 더 권장될 때가 있다...

라고 설명하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시지만,


가끔 정말 말 그대로 '오행'의 '화기'로 이를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있어 가끔 의사소통에 오류가 생길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 중엔 가끔 빌런이 있다.

오늘 소개할 빌런은 '푸른 눈의 도사' 빌런이다.




몇 년 전, 외국인 친구들을 데리고 차 모임을 자주 하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자기 지인이 정말 차를 좋아한다며 자기 친구를 데려왔다. 그 친구의 이름은 '피에르'(가명).

프랑스에서 나고 자랐고, 친가 외가 모두 프랑스 원주민 출신인 French French 프랑스인, 중국 상하이에서 3년을 유학하는 과정에서 차에 푹 빠져버렸다는 청년. 나이는 한 스물셋 즈음?


'어떤 차를 좋아하세요? 맛있는 걸로 골라볼게요'

'저는 무이암차(wuyi rock tea)를 좋아해요. 그것도 상등품만요'


꽤나 구체적인 리퀘스트를 해오는 피에르. 어떤 차를 내주지 고민하다

당해연도 정말 맛있게 나온 혜원갱 수선을 내어주기로 했다.

(*혜원갱은 무이산의 유명 핵심산지이다)


화려한 꽃향과 달달한 과일향, 그리고 긴 여운이 매력적인 차였기에 그의 취향에도 딱이라 생각하고, 차를 한잔 내어주었다.


향을 맡더니 피에르가 짓는 미묘한 표정.

한잔을 마시고 그가 내뱉은 말

'이거 너무 기운이 차요. 못 마시겠어요'

그러곤 차도 입 밖으로 뱉어버렸다. (진짜로, 물리적으로)


순간, 그 공간의 시간이 멈춰버렸다.

누가 리모컨으로 '일시정지'라도 누른 걸까.

나도 놀랐지만, 그를 데려온 친구 얼굴은 더 하얘졌다.


모두가 얼어붙은 와중, 피에르는 그 뒤로도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이 차는 잘못 만들었어요. 불기운이 모자라 찻잎의 냉기를 잘 다스리지 못하고 있네요. 이런 걸 마시면 몸이 냉해지고 질병에 걸리기 쉬워져요! 내가 유학시절에 어떤 도사님하고 함께 차를 마시며 오래 수행을 했는데, 이런 차는 정말 위험해요!'


'이게 정녕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맞나... '

'그 도사님도 대접해 주는 사람 앞에서 차를 뱉으라고는 하지 않았을 텐데...'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갔지만, 그래도 찻자리를 망칠 수는 없는 법

찻자리를 진행하는 팽주로서, 수습이 필요했다.


'다른 분들은 이 차 괜찮으시죠? 그럼 피에르에겐 다른 차를 우려 줄게요'


그가 이야기한 '좋은 화기'가 뭘지 곰곰이 생각하다, 문득 생각나 옛날에 산 '혜원갱 수선' 차를 꺼내보았다.

8.33g 한 봉지 2000원, 가격상 틀림없는 가짜였다.


무이암차 향은 있지만 불을 너무 강하게 넣어 '석탄차'에 가까운 차


이런 저가형 차들은 불맛으로 모든 디테일을 덮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산지와 품종의 향이 다 날아가고, 강한 로스팅의 탄내만 남는다.

차 원료의 품질과 부족한 제다를 가리는 방법 중 하나인 셈이다.

혹시 그런 맛을 궁금해하는 사람을 위해 '교보재'용으로 아직 서랍에 남겨둔 차였다.


한 잔 내어주자, 향을 맡은 피에르의 눈빛이 달라졌다.


'음 이거예요! 이런 차들은 묵으면 향이 정말 매력적으로 변하죠. 불기운이 잔뜩 들어간 차들이 몸을 건강하게 하고 사람에게 활력을 가져다준다고요. 서양에는 이런 차가 정말 없어요. 다들 향만 강하면 좋아하곤 하죠. 난 이 차가 정말 좋네요.'


정말로 다행히 피에르는 그 차를 맘에 들어했고, 차와 함께했던 자신의 수행이야기, '올바른' 차 생활에 대한 피에르의 연설이 중간에 있긴 했지만, 그날의 다회는 무사히 화기애애(?)하게 끝났다.



다시 오늘의 차로 돌아오자면,

지금 마시는 대만야방수선차에서도 은근히 화기가 잘 느껴지는 편이다.

누군가는 이 정도 불맛을 선호할 수도 있겠고, 오히려 좀 더 불을 강하게 넣은 맛을 선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불을 덜 쓰면 향이 제대로 피어나지 못하고,

불을 너무 쓰면 섬세한 향들이 타 버리고,

‘화기’를 잘 잡는 것은 차를 만드는 제다인 입장에서는 어려운 과제이다.


요즘 트렌드는 고급 산지의 섬세한 떼루아와 품종향을 살리는 식으로 불을 절제하는 것이지만, 불을 강하게 넣어 묵혔을 때 정말 맛있는 차들도 있다.


그래도 차는 결국엔 기호 식품, '올바르지 않은' 차 생활이란 건 없다.

누구나 좋아하는 차를, 좋아하는 방식으로 즐기면 그게 제일이다.

(물론 곰팡이가 잔뜩 핀 차를 마신다거나 하면 극구 말려야겠지만!!)


나는 맛있는 차를 즐거운 이야기와 함께 나누는 순간을 정말 좋아한다.

다회가 내 차생활의 알파이자 오메가랄까.


설령 자기 취향에 맞지 않다 해도 '올바른 차 생활'보다

사람들과의 '좋은 시간'이 내 찻자리, 다회의 모토이다.


'푸른 눈의 도사님'은 몸에 흐르는 '차기'의 흐름을 잘 알았을지 몰라도

사람들과 함께 웃고 즐기는 찻자리의 흐름은 배우지 못했던 것 같다.


대략 여덟 포 정도 우려내었을까.

차에서는 화려한 꽃향은 빠지고, 깊고 단 복숭아 향과 시원한 뒷맛만 남았다.


오늘의 차는 여기까지!


가끔 이렇게 불맛 나는 우롱차를 마실 때면

지금은 고국으로 돌아갔을 그의 차생활 근황이 때때로 궁금해지곤 한다.


* 오늘의 차

24년 대만 야방 수선


* 총평 : 5.0 / 10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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