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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자의 전성시대 Dec 14. 2024

소용의 가치

 ‘난 참 소용없는 사람인 가봐!’ 얼마 전 나를 한없이 우울하게 만들었던 생각이다. 이 생각에서 벗어나려 집을 박차고 나와 밤에는 먹지 않던 커피를 먹고, 열심히 걸었던 기억이 있다. 


 소용이란 쓸 곳. 또는 쓰이는 바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효용성이라고 하기도 하고 인간에게 접목하면 자기효능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기효능감이란 특정한 상황에서 적절한 행동을 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신념 또는 기대감을 말한다. 따라서 자기효능감이 높을수록 우린 좋다고 이야기한다. 


 우린 이건 이래서 소용없다고, 저건 저래서 소용없다고 이야기한다. ‘소용있어’라는 말보다는 ‘소용없다’는 말이 익숙한 걸 보니 우리의 정서는 소용이 없다는 부정적 뿌리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존재보다 가치가, 나의 가치 기준보다 타인의 가치 기준이 더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심지어 결혼조차도 사랑의 밑바탕이 흔들리고, 너와 내가 합치면 더 큰 소용이 만들어지는가의 기준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참으로 씁쓸하다. 어찌 우리 감정이 한낱 소용의 가치로 움직여지게 되었는가! 개탄스러워지는 이때다. 


 내가, 아니 우리가 지어진 목적을 알고 있다면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알게 되고, 내가 하는 모든 살기 위한 발버둥이 위대함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주인공이 되어 자신의 인생 속에 깊숙이 들어가 매일매일을 살아내고 있으니 지협적인 시각으로 나를 보게 된다. 그러니 지지고 볶는 자신이 실망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이의 인생이나 책을 통해 바라보는 남의 인생은 인생을 통틀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거시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니 그 인생의 소용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좀 더 여유롭고 탄력적으로 이해하고 품어주게 된다. 


 그렇다면 자신의 삶을 넉넉히 품으며 자신의 효용가치를 알려면 어떡해야 할까? 앞서 말했듯이 자신의 지어진 목적을 아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난 종종 임산부들이나 아기엄마들에게 이야기한다. “아이에게 바랐던 첫 목적과 바람을 잊지 마세요.”라고. 이 마음을 잊으니 아이들을 그리 쥐잡듯 잡는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행복하고 평안하기 위해 온 존재이다. 고생만 하다, 수고만 하다. 걱정만 하다 갈 인생이 아니란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평할 시간에 불편한 문제를 해결하고, 불만을 말할 시간에 불만의 원인을 생각할 거다. 깊은 우울이 올라와 나를 덮으면 가을색으로 덮인 주위로 눈을 돌리며 자연을 주심에 감사하려 노력할 거다. 나무의 자연에 대한 순종과 감사와 아름다움을 느끼며 어딘가 숨어있을 나의 겸손함을 찾을 것이다. 


 내 가치는 분명있다. 나는 소용 있는 사람이다. 다만 나 스스로가 그 소용을 채우려 끊임없이 노력하며 살고 싶지 않다고 선택한다. 소용 가치가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나 스스로에겐 가치가 있는 사람임을 반복해 알려주는 거다. 


 그러면 지금 지나치는 단풍나무처럼 어쩔 수 없는 변화에도 시끄럽지 않고 무거운 추를 잡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어진 목적 그대로를 느끼며 그것만 가습에 품자. 그러면 세상 두렵지 않고 나의 효용가치는 상상 이상으로 올라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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