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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이 높은 공부 못하는 아이

by 영자의 전성시대

고학년 아이 중에 얼굴이 아주 뽀얗고 하얀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참 많은 것에 관심이 많다. 어느 날은 아이돌이었다가 어느 날은 애니메이션 주인공이었다가 지금은 듣도 보도 못한 무신 캐릭터에 빠져 있다. 가방에는 정신 산란한 키링이 주렁주렁 이고 가방 속에는 별의별 것들을 가지고 다닌다.


아이는 한 가지 주제로 한 번에 소통하지 않는다. 2분 정도 하나의 주제로 이야기했으면 갑자기 "선생님 선생님, 이거 이거 아세요?" 하며 다른 화제로 돌린다. 그러다 다시 2분 정도가 지나면 또 다른 주제, 또 다른 주제, 나는 이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급 자고 싶어 진다.


아이는 공부를 못한다. 늘 학원 숙제를 안 해서 학원 선생님께 혼난다고 자랑처럼 말한다. 으이구! 나는 여러 번 잔소리를 하지만 배시시 웃는 아이를 진심으로 혼낼 수는 없다. 사실 학원 숙제 안 한다고 크게 문제가 될 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아이는 어느 날은 편의점을 털어 와 생전 못 보던 요상한 과자를 들이민다. "선생님 이런 거 본 적 있어요?" 하며 내 입에 하나를 넣어 주는데 "웩" 굉장한 신맛부터 괴상한 맛이 나는 과자까지 아이는 내가 싫다고 손사래를 치는대도 끊임없이 사 와서 내게 내민다. "너 나한테 왜 이러는 고야?"아무리 말해도 들은 척도 안 한다. 이런 날이 삼일에 한 번꼴로, 아이는 나를 골탕 먹인다.


한날은 아이가 수학 시험지를 가져왔는데 "푸하하하하" 웃음이 터졌다. 맞은 것보다 틀린 게 더 많은, 오랜만에 보는 시험지였다. 우리 학교 아이들은 꽤나 공부를 잘해서 선행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고 뭔 영재들이 그리 많은지, 국제중이나 특별 목적의 중학교에 높은 비율로 합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이 아이의 시험지를 보니 신박하다는 느낌과 아주 정감이 가는, 웃음이 터지는 시험지였던 것이다.


반전은 아이의 태도였다. 아이는 이 시험지를 보여주면서도 부끄럽거나 숨기려 하지 않았다. "선생님 이거 푸느라고 진짜 힘들었거든요? 근데 진짜 많이 틀리지 않았어요? 크크크"하는 거다. 원래도 이런 아이인 줄 알았으나 나는 이 아이가 참 건강해 보이고 예뻐 보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잘한 것만 보여주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건 꺼내지도 않을뿐더러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예전 우리 아이가 시험지를 들고 와서 전 과목 3.5개를 틀렸다고 자기 잘하지 않았냐고 해서 나는 감동하며 너무너무 잘했다고 칭찬했다. 같은 날 가르치는 학생이 전 과목 2개를 틀려서 마음이 너무 힘들다고 자기는 잘하는 게 없다며 우울해하는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었다. 어쨌든 나는 5개를 틀리건 10개를 틀리건 자기 자신에 대한 효능감이 흔들리지 않는 아이가 좋다. 훨씬 건강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마음의 아이를 보며 시험지를 버리려 하길래 "수학은 오답정리가 답이야. 버리지 말고 진도 나가지 말고 틀린 거 오답정리부터 하렴." 하고 말해 주었다. 아이는 "이거 오답 정리하려면 오래 걸릴 거 같은데요? 너무 많이 틀렸는데, 헤헤헤" 한다. 물론 공부까지 잘해주면 고맙지만 먼저는 마음이 건강하게 자라는 게 중요하다. 어떤 일이든 상황이든 자신의 모습을 어그러지게 만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게 공부라도 말이다.


영재가 넘치는 곳에서, 자신감을 넘어 자존감 마저 흔들리는 아이들 사이에서, 스스로 완벽주의로 손을 떨어가며 자신을 압박하는 이들 사이에서, 거의 다 틀린 시험지를 들고도 웃으며 할 말 다하는 아이를 보며 앞으로도 아이가 자신의 마음을 잘 지키며 단단하게 성장하기를, 공부가 아니더라도 잘하는 것을 발견해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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