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과 필요의 변곡점

<다섯째 아이> 독서 감상문

by 영자의 전성시대

책을 읽으며 떨리는 마음을 참기 힘들었다. 나와 너무 닮은 해리엇이었기에 그녀가 잘 살아서 성공하는 모습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 욕심 때문일까? 중반으로 갈수록 깔아놓은 복선으로 심장이 공포 영화를 보는 것처럼 쫀득거렸다. 인내심 많고 성실하며 자녀 사랑이 가득한, 어디 하나 빠질 데 없는 현모양처 같은 여인이 무너져가는 내용을 보며 자연스레 나의 삶을 오버랩하며 바라보게 된다.


나는 고지식한 성품으로, 첫사랑과 결혼했고 어린 나이에 아이 둘을 낳았다. 마찬가지로 어린 남편은 아빠이기보다는 사회인을 선택했고 사회인이었던 나는 가정주부가 되었다. 너무도 당연한 순리이기에 거부하거나 선택할 수 없었고 아이들의 필요와 남편의 필요를 채워주는 역할을 잘하기 위해 애썼다.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 같던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두 아이를 데리고 은행 일을 보러 갔다. 아이들은 답답했는지 그날따라 징징거렸고 그 소리에 다른 사람들이 불편할까 눈치를 보며 서둘러 접수를 했다. 잠시 뒤, 직원이 나를 불렀고 나도 모르게 ‘0’을 3개나 더 붙여 쓴 바람에 단위가 어마 무시하게 커져 있었다. 확인받지 않았으면 정말 큰일 날 뻔한 일이었다. 이 별일 아닌 사건은 나를 바보로 느끼게 했고 양육을 전담하는 일은 숭고한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나를 바보로 만드는 일은 숭고하지 않았다.


이렇듯 다 잊었던 기억들이 이 책을 읽으며 새록새록 생각이 난다. 해리엇의 결혼과 임신, 육아의 과정과 가족들 간의 관계 들이 공감이 되었다. 배시시 미소가 날 만큼 향기로운 상상력을 선물했다. 그리고 부러웠다. 나는 두 명의 아이도 힘들었는데 네 명을 낳고 기르면서도 정신적인 여유를 갖는 것과 그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지인들이 부러웠다. 그 도움을 당연히 여기는 부부가 위험해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또한 내 남편과 다른 데이비드의 양육 태도도 좋았다. 경제적인 부분도 오롯이 책임지고 양육도 함께하기 위해 노력하는 남편이기에 데이비드의 허울 좋은 허영심은 용서가 되었다.


평화롭기만 하던 해리엇은 다섯째를 임신하며 괴로워하며 예민해지기 시작한다. 그럴 수 있다. 여자들은 누구나 임신을 할 수 있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나 하는 것’은 ‘쉬운 별거 아닌 일’로 치부하는 것에 격렬히 반대한다. 가족들은 이 부부가 계획 없이 아이를 갖는 것에 공공연히 불만을 나타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비난은 그들의 몫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이 또한 넘겨보기로 했다. 부모가 낳겠다는데 누가 반대할 수 있으랴!


외동딸인 나는 기본적으로 형제가 많은 가정을 선호하기에 이때도 해리엇의 삶이 멋있게 보였고 외할머니 도로시의 비난도 있지만, 경제적으로나 양육하는 면으로 주변인들이 채워주고 있어 브리짓이 이 가정을 부러워하는 만큼 나도 부러웠다. 어차피 가족은 모두 희생하며 가정을 이루는 것이 아닌가? 누가 아빠와 엄마의 역할을 미리 알 수 있을까? 누가 첫째고 싶고 막내고 싶을까? 그냥 그렇게 태어나 그 역할을 감당하는 것, 가족의 필요를 조금씩 채우며 나의 필요도 이곳에서 공급받는 곳, 그것이 가족이자 가정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들의 행보가 나는 불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해리엇은 불편해했다. 다섯째 아이가 급히 생긴 것도, 엄마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것도, 자신이 ‘행복’이라고 계획했던 일들을 이끌어가지 못하는 체력에도 심기가 불편했다. 더구나 뱃속의 아이가 역동적으로 움직여 자신의 몸을 지탱하는 것조차 어려워지며 신경질적으로 과민해진다. 이해한다. 임신이란 아무리 많이 해도 그때마다 각기 다른 어려움을 잉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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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레싱은 이때부터 뱃속에 있는 태아의 거대한 영향력에 대해 표현하기 시작한다. 먼저 데이비드가 ‘평상시 같지 않은 해리엇’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해리엇은 변하기 시작한다. 또한 그 가정에 눈물과 속상함이라는 감정을 끌어들이고 비난의 말들을 퍼붓게 만든다. 더 나아가 다른 이들이 이 부부를 예전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존경심으로 대하던 인생이 그 뒷면을 보이기 시작하는 시점이 된다. 심지어 이 가정을 부러워하며 닮고 싶어 하던 브리짓은 “난 이런 행복한 생활이 언젠가는 끝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라며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을 정도다.


이제부터 이 책은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금쪽같은 내 새끼’의 한 편처럼, 육아와 아동문제 그 사이의 어디쯤으로 흘러간다. 해리엇은 그동안 당연하게 여기며 감당했던 ‘엄마의 역할’에 대해 ‘혼자 오롯이 견뎌야 하는 고통’이나 ‘가족들은 아무도 모르는 나만 느끼는 외로운 투쟁’으로 관점을 바꾼다. 그리고 그전에는 자녀들을 ‘사랑’이나 ‘행복’으로 표현했다면 다섯째 아이에 대해서는 ‘원수’,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적’, ‘괴물’이라고도 표현한다. 이렇게 말하는 엄마 해리엇의 마음은 지옥 같은 고통을 내포한 인내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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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서웠다, 이 표현들을 하기 위해 설명하는 서사들이 지극히 현실적이고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또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기에 한 장 한 장이 소설이 아닌 한 여인의 일기를 보는 것처럼 소름 끼치는 공감을 했다. 하지만 도리스 레싱이 깔아놓은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 사건과 등장인물들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했다. 마치 나도 이 집에 초대받은 손님으로,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이 책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벤에 대해 설명해놓은 여러 정황 들은 실제 일이 아니라 해리엇의 추측, 또는 작가의 정황들뿐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벤은 매우 식욕이 뛰어나고 힘이 센, 역동적인 아이일 뿐인데, 마치 무슨 일인 양 벌일 듯 무서운 분위기로 묘사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우량아로 태어나 그에 걸맞게 많이 먹고, 잘 크는 힘센 아기일 뿐이다. 그리고 젖을 물릴 때 보통 아이들도 물때가 종종 있다. 이런 사소한 일조차 도리스 레싱은 해리엇을 통해 벤이 무슨 문제가 있는 양으로 나타낸다. 또한 어린 벤이 개를 죽인 것처럼 분위기를 만들었지만 결국 그 개의 죽음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어린아이라고 왜 못 죽이겠는가?’라는 말과 함께 해리엇은 벤을 가두었다. 이것은 본 우리는 마치 ‘벤이 개를 죽였다.’로 오인하게 된다. 개를 죽일 수 있는 벤은 이후 감옥 같은 병원에 보내지게 되고 ‘우리의 오인’으로 인해 이 일은 당위성을 갖게 된다. 이 반복적인 오인과 사고가 나의 일상에도 도사리고 있어 읽는 내내 그리 무서웠나 보다.


그렇다면 이 가정의 오인은 어디서부터 시작인 걸까? 넓은 이해로 넘겨왔던 지점들을 다시 짚어보며 깐깐히 읽었다. 첫째 이 부부는 자신들도 인정한 ‘변종’이자 ‘괴짜’였다. 완고한 개성을 방어하고 스스로의 신념이 옳다고 지켜내는 사람, 행복조차 자신들의 계획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자만, 자만과 신념과 개성을 고집스럽게 지키기 위해 오만한 삶을 산 것이다. 이 탄력성 없는 오만함이 어느 순간 고통으로 전환될 수 있는 위험이기에, 이 폭탄을 처음부터 안고 시작했던 것이다. 해리엇은 그것을 깨닫고 데이비드에게 말한다. “우린 벌 받는 거야. 잘난 척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야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행복해서.”


둘째로 이들은 스스로가 일구어낸 가정이라 자부했지만, 그것 또한 이들의 착각이었다. 능력만큼의 욕망을 가져야 하는데 자신들의 결핍을 보지 못한 채, 그 결핍으로 시작된 욕망으로 가정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구멍이 생기고 그 구멍을 막고자 더 많은 손님들을 초대해 결핍으로 만든 허세를 채워나간다. 하지만 그 구멍은 더 크게, 더 깊이 썩어갔고 그 원인으로 벤이 찍힌다. 벤은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는 것이다. 해리엇의 엄마 도로시는 말한다. “너희 둘은 마치 모든 것을 움켜잡지 않으면 그것을 놓쳐버릴 거라고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구나.”


셋째, 이들은 ‘결혼과 가정’을 너무 쉽게 봤다.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누구나 한다고 쉬운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룬다. ‘가정’을 꾸리는 건 쉽지만 ‘바람직한 가정’을 만들어 가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 말할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이자 중요한 이 개념을 이들은 무시했다. 결국 이들은 정상적이나, 자신들의 관점으로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아이 하나로 파국을 맞는다. ‘데이비드는 이제까지 해왔던 식으로 일하느라 가정적인 남자로서의 자아를 잃어버렸다. 그의 노력 덕분에 회사에서는 성공을 거두었고 또 다른 회사에서 훨씬 나은 직장을 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중심이 있는 곳은 이제 그곳이었다. 이제 그는 한때 결코 되지 않겠다고 결심한 그런 종류의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단지 이해받기를 원했고 그녀의 곤경이 제대로 평가받기를 원했다. “난 벤이 태어난 이후 줄곧 벤 때문에 비난을 받아온 것 같아요. 난 죄인처럼 느껴요. 사람들이 내가 죄인처럼 느끼게 만들어요.”’


그렇다. 그들은 가정을 쉽게 보는 오만을 저질렀으며 가정에서 자신들의 결핍을 채우려 했다. 그리고 그것을 행복이라고 정의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그러나 나 또한 같았다. 결혼하면서 ‘무조건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야지’, ‘현모양처가 되어야지’라는 대단한 꿈을 꾸었다. 그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도 모른 채, 이후 현모양처가 될 수 없어서, 행복한 가정이 아닌 것만 같아서 나는 나를 용서하기가 어려웠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정상이었음을 확인받는 것 같아 감사하기도 했다.


작가의 필력은 대단하다. 이러니 노벨문학상을 받은 거겠지. 인용하고 싶은 문단도 많고, 사유해야 할 문장도 부지기수다. 또한 생각할 거리도, 논란의 여지도 다양하다. 이해가 되지만, 이해할 수 없기도 하다. 두 번을 읽었지만, 여전히 현실에 빗대어 문제를 해결하려 하니 암담하다. 다만 어떤 것이 문제인지, 문제의 원인이 보인다. 문제로 보이지 않으면 해결이 되지 않지만, 문제로 대두되었으니 이제 한 걸음씩 문제를 해결해 보려 내 인생에 뛰어들 준비를 한다. 자,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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