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이 까다로운 나는 소식 파다. 크게 좋아하는 음식이 없어서 먹는 것이 곤욕일 때도 있다. 하지만 가끔 도토리 묵사발이 당겨서 급작스럽게 포장해다 먹을 때도 있고 동생이 가끔 묵사발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쳐다도 보지 않던 음식이 어느 날 갑자기 좋아지기도 하나보다.
부모님이 지방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기 시작하며 안 하던 일을 하느라 팔을 움직이기 힘들어하셨고, 검사해 보니 두 분 다 근육이 파열되어 수술을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엄마는 연골주사를 맞고 진통제를 드심으로 위기를 넘겼고, 아빠는 덜 바쁜 겨울에 수술하겠노라 예약한 상태이다. 그러다 보니 저녁마다 끙끙 앓으며 잠이 드셨고 통증으로 자주 잠에서 깰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안쓰럽기도 하고 안 해도 되는 일을 사서 하는 것 같아 화가 나는 마음으로 자주 잔소리를 했다. “일하러 내려온 것도 아니면서 도대체 일을 왜 이리 많이 하는 거야? 몸 생각을 해야지.”
오랜만에 부모님을 볼 겸 집에 내려가니 일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고추 농사에 고구마, 비트, 배추, 가지, 무 등등해야 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서울에서는 노래 교실과 운동만 하고 다니던 분들이 노년에 농사를 짓다 보니 육체적. 정신적 어려움이 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땅을 놀릴 수 없다’ 하시니 자식인 나는 지켜보아야 했다.(펄 벅의 <대지> 속 왕룽 같다) 내려간 김에 맛있는 걸 사드리려 하루 강릉 데이트를 했다. 회도 먹고 바다도 보고 돌아왔다. 좋으시면서도 일을 하루 못했다며 투정도 하셨다.
다음 날 새벽, 나는 잠결에 분주한 소리를 들었다. 느지막이 나가 보니 식탁에 어제까지 없던 도토리묵이 쑤어져 있었다. 후에 들어보니 여름 내내 우리 집 뒷산에서 도토리를 모아 말리고 껍질을 벗기고 1시간이나 떨어진 원주까지 가서 갈아와 어제 물에 불려놓고 있었단다. 어제 하려 했는데 못 하게 되어 새벽부터 일어나 4시간을 들통 속의 묵을 번갈아 가며 젓고 있었다. 안 그래도 팔 쓰지 말라고 의사가 신신당부했건만 그놈의 묵이 뭐길래 두 팔로 붙들고 4시간을 넘게 젓고 있는지, 나는 그냥 기가 막혔다.
나의 입은 잔소리로 열렸고 부모님은 난처해하며 “어디 가서 이런 귀한 걸 먹겠니? 이런 건 돈 주고도 못 먹는 영양덩어리야. 도토리묵은 몸속의 염증을 제거해 주고 암에도 좋은 거야. 그리고 우리 딸이 좋아하는 거잖니!” 하셨다. 서울에서 ‘묵’은 지천에 널려 있다. 비싸지도 않은 음식이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건데 왜 이리 힘들게 오랜 시간 그 팔로 정성 들여 만드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계속 화를 내는 내게 엄마는 묵 귀퉁이를 떼어 내 입에 넣어 주셨다.
생긴 것도 파는 묵과 달랐고 맛도 씁쓰레하니 쓰고 떫었다. “윽, 맛이 가 없어.” 하고 엄마에게 말하니 원래 진짜 묵은 이런 맛이라며 이런 묵이 좋은 거라고 여러 번 강조하셨다. 그래도 여전히 맛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묵이 소중한 음식이라는 건 알았기에 엄마에게 몇 개 싸 달라고 했다. 그래서 서울의 가족들에게 나누어 드렸다. 다들 너무나 맛있다고 귀한 음식을 주어 고맙다는 반응이었다. 그들은 묵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고 있기에 말하지 않아도 귀한 줄 알았고, 나에게는 맛이 없게 느껴지는 이 맛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냉장고 속의 묵을 내려다보며 나는 우리 엄마의 정성에 대해 생각한다. 누가 나에게 이런 귀한 음식을 만들어 주겠는가! 얼마 전 요즘 유행한다는 비싼 ‘파인 다이닝(fine-dining)’의 코스요리도 먹어 봤으나 이 도토리묵 한 덩이와 비교할 수 없다. 내 부모님의 4개월의 시간과 땀이 녹여져 들어간 묵 한 덩이가 내 맘을 묵직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