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따라 남편의 뒷모습에 자꾸 신경이 쓰인다.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과 귀를 덮은 곱슬머리가 천생 베토벤의 모습과 흡사하다. 갈아입으라고 바지를 내놓아도 굳이 구겨지고 후줄근한 옷을 그냥 입고 나서는 것을 보니 정말 같이 사는 남편이 맞나 싶다.
피부가 하얘서 그런지 남편은 눈에 띄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지인들은 남편이 귀공자처럼 자라 고생은 전혀 안 해 본 사람일 거로 생각한다. 그렇게 깔끔하고 귀티난 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 집에서 뒹굴던 것처럼 아무렇게나 하고 나가는 것을 보니 영 뒤가 개운치 않다.
남편을 배웅하고 돌아서는데 콘솔 위에 놓여있는 도자기와 눈이 마주친다. 늘 같은 자리에 놓여있었는데 오늘은 마치 새로운 것이라도 발견한 양 두 눈이 재빠르게 도자기를 주워담는다. 은은한 청자 빛에 작은 학이 그려진 항아리다.
습관처럼 무심코 지나치려다 갑자기 항아리의 뒤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졌다. 항아리를 들어 돌려보았다. 그래도 역시 같은 모습이다. 사방이 모두 둥글다. 날씬하게 잘 빠져 요염해 보이기까지 하는 주둥이 말고는 대체로 민틋하다. 머리를 숙여 안을 들여다봐도 둥글다.
도자기를 한 바퀴 돌리며 찬찬히 뜯어본다. 이 항아리도 도자기로 빚어지기 전에는 한낱 흙이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잘나지도 눈에 띄지도 않던, 그저 땅 위에서 평범하게 뒹굴던 흙일 뿐이었다.
도자기의 뒷면을 보니 문득 남편의 야윈 젊은 날이 떠올랐다. 후유, 한숨이 나온다. 10여 년이나 지난 일이라 이만하면 잊을 법도 한데 아직 뼛속까지 다 아물진 않은 모양이다.
이미지가 차가워 냉정할 것 같은 남편은 뜻밖에 마음이 여리고 사람을 잘 믿는다. 그렇게 자기 맘만 생각하고 남을 잘 믿는 습자지 귀 때문에 하마터면 길바닥에 나 앉을 뻔했던 일이 있었다. 남자는 한 번쯤은 보증을 서주어 집안 망신을 시킨다
더니 남편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혼하고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고생스럽게 사는 남편 친구가 있었다. 초등학교 동창인 그는 일거리가 없어 허덕이고 이미 신용불량자라 은행거래도 막혀있었다.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이라 남편은 어렵게 사는 친구를 늘 안타깝게 여겼다.
남편은 나 모르게 친구에게 보증을 서주었던 모양이다. 가끔 보증 서달라는 부탁에 남편도 몇 번은 거절했지만 자칫하면 간신히 꾸려나가고 있던 공장이 경매로 넘어가게 생겼다는 친구를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고 했다.
어느 날 퇴근하고 들어오는데 우편함에 빨간 글씨로 쓰인 독촉장이 꽂혀있었다. 남편 앞으로 온 독촉장에는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금액이 적혀있었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는 내게 남편은 친구가 갚는다고 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살았기에 그저 남편의 말만 믿었다. 그러고도 몇 번의 독촉장이 더 날아오고 은행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더니 급기야는 남편의 급여 압류와 우리 집을 저당 잡겠다는 단호하고도 간결한 내용이 적힌 최고장이 날아왔다.
눈앞이 깜깜했다. 나 몰래 대출해 빌려주고 보증 서준 것만도 화가 나는데 집을 압류한다니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적은 돈도 아니고 웬만한 직장인의 1년 치 연봉이 넘는 금액이었으니 쉽게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오늘내일 갚겠다고 미루던 남편 친구는 이미 자취를 감추어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기저귀도 떼지 못한 딸애를 어린이집에 맡기며 맞벌이해 정말 어렵게 마련한 내 집인데 하루아침에 거리로 나가게 생겼으니 말문이 닫혔다. 그러고 나서 강산이 한번 바뀌고 다시 몇 번의 봄이 말없이 왔다 가는 동안 남편은 친구의 빚물이 하느라 언제나 겨울나무 같았다.
참, 이상하다. 왜 모든 것들의 뒤편을 들추면 서러운 것들이 많을까. 어릴 때 뒤란에 가면 왠지 을씨년스럽고 스산한 기분이 들었다. 그곳에는 깨진 항아리나 찢어진 고무신, 녹슨 놋그릇 등 앞에 내놓기 민망한 물건들이 많았다. 그렇게 보기 흉한 물건은 뒤란에 숨겨놓는 것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뒤에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아픔과 슬픈 그림자가 깔려있다. 흙이 도자기가 된 것처럼 화려함 뒤에 숨겨진 훈장 같은 흔적들이다.
친구의 배신으로 우리 부부는 얼마나 긴 세월을 되돌아왔는지 모른다. 그날 이후 남편과 나는 오랜 시간 낯선 곳에 서 있었다. 힘겹게 닥친 일이 모두 남편의 잘못이라 생각해 눈조차 맞추지 않았다. 내 아픔만 생각하고 남편의 고통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당장 내 눈앞에 닥친 삶이 서럽고 믿음을 저버린 남편이 용서되지 않았다.
어느새 오후 세시의 문턱에 다다른 남편은 그 친구를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던 친구였지만 지나가던 세월이 슬쩍 그의 안부를 전해주었다. 남편은 뒷일은 다 묻어두고 어느 한 시절은 그와 함께 울고 웃던 막역한 친구였다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단다.
그렇다. 남편의 말처럼 누군가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은 그 사람의 뒤란까지 감싸 안아야 하는 일이다. 눈에 보이는 것뿐이 아닌 그의 등 뒤에 숨은 쓸쓸한 그림자까지도 보듬을 줄 알아야 할 것 같다. 내가 만약 남편의 어두웠던 뒤를 껴안지 않았다면 남편은 지금 어디쯤 서 있을까? 어쩌면 남편은 남루한 자기의 뒤를 감추기 위해 또 다른 뒤편을 만들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