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지

by 박종희

포장지



상자가 제법 크다. 무엇이 들어있을까. 택배로 보내온 선물을 앞에 놓고 가슴이 설렌다.

조심스럽게 테이프를 자르고 상자를 여니 분홍색 꽃무늬 포장지에 싸인 작은 상자가 나온다. 무엇이길래 이리 단단히 동여맸을까. 리본으로 묶은 포장지를 벗겨내니 다시 고급스러운 한지에 싸인 선물이 나온다. 세 겹의 겉옷을 벗고 드디어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종합비타민 세트다. 요즘 홈쇼핑에서 유명세를 치르며 이름값을 높이는, 갱년기 여성들한테 인기 있는 제품이다. 나한테 아주 맞춤형 선물이라 기분이 좋다.

내용물을 상상하게 만드는 근사한 포장지를 벗기면서 한때 친정어머니의 포장지로 살던 일이 생각났다. 육 남매 중 딸로는 장녀로 태어난 나는 부모님의 자랑거리였다. 병치레로 애를 먹이던 것 말고는 부모님의 기대치를 맞춰주는 딸이었다.

80년대 초,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나는 은행 공채에 합격했다. 당시에는 여행원의 인기가 많았다.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자식이 은행원이 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뉴스거리였다. 평소 내가 은행에 근무하는 게 소원이라고 하시던 어머니는 내가 은행원이 된 것을 입에 물고 다니셨다. 소문은 담벼락을 넘고 골목을 달려 금세 작은 마을을 짝자글하게 달궜다. 어느새 우리 집 안테나 주파수는 나를 중심으로 흐르고 있었다.

위로 둘이나 되는 오빠들도 번듯한 직장인이었지만, 어머니는 나를 더 자랑스러워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좋으셨을까. 어머니는 아침 출근길마다 버스정류장까지 나와 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고, 가로등도 없는 어둑어둑한 밤길에서 파김치가 되어 퇴근하는 나를 기다렸다. 유난히 자식에 애착했던 어머니의 자식 사랑 방법이었다.


발령받으면서 드디어 내가 어머니께 목숨 빚을 갚을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그 어려운 시절에 육 남매를 키우느라 애쓴 어머니의 시간을 기억하기에 나는 태어나 내가 들어 쓴 어머니의 인생을 꼭, 보상해 드리겠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런 날이 빨리 찾아왔으니 말이다.

어머니는 됐다고, 헛돈 쓰지 말라고 하면서도 내가 손을 내밀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따라나섰다. 은행 근처 식당에서 어머니가 좋아하는 갈비탕과 추어탕을 사 드리고, 모양 내기 좋아하는 어머니와 미장원에 가서 유행하는 파마도 했다. 부모님이 가장 부러워하던 제주도 여행을 보내 드리고. 동네 아주머니들을 불러 모을 2단 냉장고와 세탁기, 전기밥솥도 신형으로 바꿔드렸지만, 어머니의 어깨를 으쓱하게 할 자랑거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 인생의 포장지를 너무 일찍 벗겨버렸다. 더불어 어머니의 자존감도 무너뜨렸다. 어머니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던 직장을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은행에 입사한 지 9년 차 되던 해에 결혼했다. 딸도 약한데 사위 될 남자까지 약하게 생겼다고 어머니는 남편을 그리 탐탁해하지 않았다. 그해 가을, 딸애를 임신했는데 입덧이 너무 심했다. 일반적인 임산부라면 어느 시기가 지나면 입덧이 멈추는데 나는 열 달 내내, 입덧을 했다. 남들 다 갖는 아기를 혼자 가진 것처럼 유난 떤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몸이 따라 주지 않으니 야속했다. 임산부 중에 아주 희귀하게 나타나는 ‘임신오조’ 증상 때문이었다. 종일 울렁거리고 물만 먹어도 토하는 바람에 직장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요즘 같으면 휴직이라도 할 텐데 당시엔 여직원이 임신한 것만으로도 눈치가 보이던 시절이었다. 몇 달을 고민하다 사직서를 제출했다. 어머니는 그 좋은 직장을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만두었다며 내내 서운해하셨다. 오죽하면 어머니는 내가 직장을 그만둔 뒤부터 은행이 있는 건물은 쳐다도 안 보고, 시내에 나가도 그쪽은 피해서 다녔다고 하셨으니, 후유증이 오래갔지 싶다.

내가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포장지였던 것처럼 딸애도 내 어깨를 으쓱하게 해 주는 자랑거리였다. 비록 딸애 때문에 직장은 포기했지만, 딸애는 탄생부터 내게 기쁨을 안겨주었다. 나한테 엄마라는 위대한 이름을 지어 주고, 착한 딸을 두었다는 수식어를 붙여주었다. 딸애는 그 무섭다는 사춘기도 없었다. 장학금을 받으면서 대학을 졸업하고 내가 원하던 공무원 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속 썩인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내가 쓴 각본대로 연기하는 배우로 나의 자부심이 되어 주었다.

딸애가 부족한 내 격을 높여주고 자존심을 지켜줄 때마다 친정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나도 은근히 딸 자랑이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내 이름 석 자보다는 누구의 엄마로 불리며 부럽다는 말을 들을 때는 괜히 우쭐해졌다. 아니, 어쩌면 그런 말이 듣고 싶어 마음대로 각본을 수정하며 내가 만든 무대에 딸애를 세우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나는 제법 근사하게 포장되어 빛이 났지만, 딸애는 많이 외로웠을 것 같다. 딸애가 진로 결정을 할 무렵에 했던 말이 아직도 가슴에 따갑게 박혀있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며 한 달 만에 소설 한 편을 완성한 딸을 설득해 내려 앉혔을 때. 딸애는 “나는 왜, 엄마가 원하는 직업을 선택해야 해?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살면 안 돼?”라고 하면서 울먹였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답답하다. 작가로 글밥 먹고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실은 내 맘 편해지자고 말린 것이 아닌가 싶다.

자식이 무엇일까. 내 속으로 낳았지만, 내가 못 펼친 꿈을 자식을 통해 이루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지 싶다. 내가 일찍 그만둔 직장 때문에 두고두고 후회했었기에 딸애는 신분이 확실한 직장에서 오래도록 근무하길 바랐던 것 같다. 그런 욕심과 보상 심리가 딸애는 얼마나 부담이 되었을까. 딸애도 자식이기 전에 하나의 인격체라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남의 낯을 내주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들은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가슴은 항상 뻥 뚫린 듯 공허할 것 같다. 포장지도 예외는 아닐 듯싶다.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싸지 못하고 내용물이 원하는 대로 이용당하니 말이다.

살면서 포장지의 마음을 헤아려 본 적이 있었던가. 내가 부모님의 포장지로 산 적이 있으면서도 딸애의 마음을 살피지 못했던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딸애도 부모의 자랑으로 사느라 순간순간 얼마나 짜증 나고 힘들었을까. 이제라도 딸애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비타민을 뱉어내고 바닥에 어지럽게 널브러진 상자 조각을 줍는다. 이것들도 비타민을 지키느라 얼마나 용썼을까. 택배차 안에서 다른 상자들과 부딪히고 흔들리면서 다치지 않고 부서지지 않으려 얼마나 마음을 붙잡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택배 상자도, 포장지도, 함부로 버릴 수 없을 것 같아 가지런히 접어 정리한다.

재활용 수거함에 포장지를 넣으며 위로의 말을 건넨다. 다시 재생된다면, 누군가의 자랑거리가 되지 말고. 자랑하는 삶이 되라고…

작가의 이전글이음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