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나둘셋 May 09. 2024

나를 견제하는 상급자를 만났을 때의 처신

새로 부임한 기관장은 내가 나가 주기를 바랐다. 결국 나는 새 기관장 부임 5개월 만에 그만두고 나왔는데 두고두고 그 상황을 복기하게 되곤 했다.


당시의 나는 기관의 실무를 총괄하며 기관장을 보좌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새로 온 기관장은 내 얘기를 귀담아듣지 않았고 오히려 내 의견에 즉각적인 반대 의사를 표할 때가 많았다. 반면 나의 하급자들 의견에는 아주 호의적으로 반응을 했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 자세를 낮추려고 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서 결국 사표를 냈고 사표는 금세 수리됐다.


반전은 그다음이었다. 기관장은 당장 주말에 좀 보자고 하더니 4~5 시간 동안 나를 붙잡고 기관 운영의 어려움을 시시콜콜 의논하는 것이었다. 이제 그는 거의 매일 퇴근 무렵이면 내게 전화를 했고, 매 주말마다 만나자고 해서는 직원들의 보고서를 봐 달라고 하거나 상급 기관에 제출할 보고서를 아예 나더러 써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나는 6개월 넘는 기간 동안 최대한 호응하며 성의를 표하고 더 이상은 기관장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이 경험은 내게 '나보다 못한 상급자를 만났을 때 어떻게 처신하는 게 좋을까.'에 대한 고민을 안겼다. 정확히 얘기하면 '스스로를 나보다 못하다고 믿는 상급자를 만났을 때'가 되겠다. 새 기관장의 이력은 단출했다. 제대로 된 조직 경험은 3년 정도였고 나머지는 산학 연구에 드문드문 참여한 이력이 전부였다. 나의 이력과 비교하면 기관장의 이력은 말 그대로 일천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기관장은 처음부터 나를 견제했다. 나와의 첫 면담 자리에서 그는 내게 질문은 하지 않고, 자신이 공식 이력에는 표시되지 않은 온갖 산전수전을 겪은 고수라는 점만 한참 동안 강조해 얘기했다. 그 후에는 앞에서 말한 대로였다. 시종일관 그는 내가 나가주기를 바랐다.


그때까지 나는 상급자들로부터 신뢰를 얻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던 터라 처음 겪어보는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내게는 기관장을 얕보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나는 정말 공손했고 기관장이 오해할 만한 언행을 한 일이 없었고 거듭 나를 낮추며 기관장을 보좌하려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진심이 통하지 않았다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비슷한 상황을 다시 맞는다면 나는 대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초한지>의 무장 '한신'이 떠올랐다. 한신은 유방을 도와 통일제국 '한'의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일찍이 행정가 소하는 유방에게 "작은 나라의 왕으로 만족할 거면 한신이 필요 없지만 천하를 도모할 생각이라면 한신 없이는 불가능하다."라고 했고, 실제로 한신이 아니었으면 유방은 한 제국을 세우지 못했을 터다. 그러나 유방은 천하를 통일하고 황제에 오른 후 한신이 반란을 꾀했다는 상소문 한 장에 한신을 죽여버린다. 유방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신을 두려워하고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한 제국 건설에 앞서 유방과 항우의 전투가 치열하던 때에 괴철이라는 인물이 한신에게 스스로 왕위에 오를 것을 주청하면서 '천하를 세 등분해서 한신과 유방, 항우가 각각 북쪽, 서쪽, 동쪽을 다스린다면 힘의 균형이 맞춰질 것'이라고 고언을 했었다. 그러나 한신은 유방을 배신할 수 없다며 괴철의 제안을 거절했고, 괴철은 한신이 훗날 유방에게 사로잡혀 치욕스럽게 죽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낙향했다.


한신은 유방에게 죽임을 당하기 직전에 "내가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었으면 진작에 했을 일인데, 어찌 지금 와서 내게 이러는가."라고 하며 "내가 괴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원통하다."라고 하고 숨을 거둔다.



나는 내 경험을 복기하는 내내 '어떻게 하면 내가 상급자를 거스를 생각이 없다는 점을 이해시키고 상급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까.'에만 초점을 맞췄었다. 그런데 '한신'을 떠올리는 순간, 내 고민의 방향을 좀 더 다양하게 가져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누군가의 존재 자체가 위협일 수 있다. 그 누군가는 나를 위협할 생각이 전혀 없어도 나를 둘러싼 관계와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나를 위협하는 상대가 될 수 있는 법이다. 기관장은 나를 그런 존재로 본 것 같다. 새 기관장은 상급기관과 직원들로부터 나와 자신이 비교당할 수 있다는 점이 신경 쓰였던 것 같다. 더 나아가서 그는 내가 상급 기관과의 소통을 전담하고 있고 직원들과 지낸 시간도 길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자신에게 불리한 여론을 만들 수 있다고 봤을 것도 같다. 거기다 대고 '기관장님을 넘어설 생각이 없어요. 제발 알아 주세요.'라고 할 생각만 했으니, 내가 미련했던 거다.


'나보다 못한 상급자를 만났을 때의 처신'에 대한 답은 하나가 아닌 것 같다. 상황에 맞추되 과거의 나처럼 무조건 충심을 꺼내 보이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필요하면 나의 세력을 만들어 싸우고 내 몫을 주장하며 상대를 압박할 수도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Pixabay로부터 입수된 Gerd Altmann님의 이미지 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람 안 변해, 그냥 내 식대로 사는 거지! 라고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