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을 향한 욕구, 피시스(physis)
치유의 대상을 환자로 보자면, 환자는 어떠해야 할까요? 환자는 순응적이어야 하고, 수동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적절한 치료를 잘 받고 충분히 휴식하여 얼른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장하고자 하는 건강한 사람들은 순응적 일리가 없습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입니다. 설마 사회가 우리를 그저 순응하는 얌전한 시민이기를 바라는 마음에 '치유'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환자의 자리에 앉혀놓은 것은 아닐까요? 비약이 좀 심한 것 같지만 성장을 목표로 한다는 학교라는 공간에서도 종종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순응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장을 위한 투쟁 수용하기
아이를 키우면서 종종 겪는 딜레마가 있습니다. 교사로서 학생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인데, 바로 아이의 성장 욕구와 어른의 관리(지도) 책임이 부딪히는 순간입니다. 교류분석을 만든 에릭 번은 physis라는 개념을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자연의 힘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바로 그 '투쟁' 때문에 부모와 교사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몸을 사용하는 능력과 생각하는 힘이 아직은 미숙한 아이들의 성장을 향한 투쟁은 어른의 눈에는 매우 위태롭고 거칠어 보입니다. 하지만 결론은 아이의 성장을 위한 투쟁을 돕는 것이 부모와 교사의 역할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투쟁'을 어떻게 아름답게 볼 것이며, 마음 깊이 수용해 낼 수 있을까요?
우리 집에 사는 성장의 투사는 아주 어렸을 때에는 '던지기'에 몰입했고, 이후에는 '기어오르기'에 인생을 건 듯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우리 아이에게 '기어오르지 마!'는 '성장하지 마!'와 같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인간 발달을 충분히 이해하고 아이의 행동을 관찰하면 '잘못된 행동'이랄게 없습니다. 하지만 발달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경우 아이가 보여주는 많은 행동들은 '위험한 행동' 혹은 '문제 행동'이 됩니다. 성장으로의 '투쟁'을 아름답게 보아낼 수 있는 방법은 인내심도 아니요, 선한 마음도 아닙니다. 그저 인간의 발달을 잘 이해하는 것입니다.
6개월에서 18개월까지의 아이는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대근육과 소근육을 열심히 발달시키고 감각과 신체능력의 협응을 위해 열심히 노력 중입니다. 그리고 18개월에서 36개월까지의 아이는 생각하는 능력을 바탕으로 신체를 사용하여 다양한 실험을 벌이는 시기라는 것을 안다면 아이들의 행동이 그저 문제행동이 아닌 성장을 위한 아름다운 도전으로 보일 것입니다. 이것은 교류분석의 발달단계 이론에 근거한 설명입니다.
인디언 부족인 예콰나족이 아이의 성장을 바라보는 관점도 교류분석 이론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음을 아래의 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콰나족 사회에서는 무엇보다도 아이의 인격을 존중해 준다. '나쁜 아이'라는 개념도 없고, 반대로 '착한 아이'의 기준도 없다. 예콰나족은 아이의 동기는 어디까지나 사회적이며 반사회적이지 않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아이가 어떤 행동을 하든 '온전하게' 태어난 생명체의 행동으로 받아들여진다. 온전함 또는 사회성을 인간의 타고난 본성으로 바라보는 이러한 시각은 상대가 나이가 많든 적든 예콰나족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의 핵심을 이룬다. 아이의 주변 사람이나 부모는 아이의 발달을 격려할 때도 이러한 시각에서 출발한다.
-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 p. 139-140
인디언 부족인 예콰나족 사회의 인간관과 같이 교류분석에서도 존재의 긍정성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 다. 우리는 모두 긍정적인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다만 개개인마다 성장해 온 환경이 다르고 생물학적 차이가 있다 보니 성인이 되었을 때 저마다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태어나는 순간에는 모두 공주와 왕자로 태어났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얼마나 귀한 존재였는지 떠올려보세요-
막무가내로 행동하고, 떼를 쓰고, 질투를 하는 일련의 과정은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행동발달입니다. 이것을 설명하는데만 해도 아주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여 '아이를 키워야 하는 이유 1'이라는 저의 책에 출생에서부터 만 6년까지의 발달과정을 교류분석의 발달단계 이론과 저의 사례를 근거로 하여 기록해 두었습니다.
성악설과 성선설, 어느 쪽을 믿으시나요?
사람은 원래 악한 존재일까요? 원래 선한 존재일까요? 제 생각에는 누구나 존재 자체는 선하지만(옳지만), 성장을 위한 욕구로 인해 행하는 행동 중에는 잘못된 행동(악)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한 악을 마주할 때 그들의 마음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시스(physis)를 함께 볼 수 있다면 어떨까요? 저는 성장하는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의 문제 행동의 결과보다 성장하고자 하는 아이의 욕구를 바라보았습니다. 발달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각 단계마다 새로운 문제를 폭발하듯 보여주는 아이를 못난 개구리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넌 정말 나쁜 아이야!"라고 말하는 것과 "우리 아들! 너는 장난감이 너무나도 갖고 싶었겠지만, 동생 것을 빼앗는 것은 나쁜 행동이야."라고 말하는 것을 비교해 보세요. 전자는 아이의 피시스를 무시한 표현이고, 후자는 피시스는 존중하되 행동의 잘못은 분명하게 지도를 한 표현입니다.
존재는 옳으나 행동은 틀릴 수 있다는 마음으로 성장하는 이들을 바라보아 주세요. 그들이 어린 아이든, 다 컸지만 아직 성장 중인 청소년이든, 누가 보아도 어른이지만 아직 내면에 성장하지 못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험한 세상을 살아내고 있는 성인이든 상관없이 모두를요-
공주와 왕자를 개구리로 만드는 법
'개구리 왕자'에 나오는 왕자는 왜 개구리가 되었을까요? 아마도 피시스를 인정받지 못하고 성장을 위한 투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왕자가 아닌 개구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건 아닐까요?
우리는 과연 우리가 키우는 아이들, 그리고 우리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개구리로 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혹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개구리라고 깎아내리고 있지는 않은지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끊기가 없어.', '나는 게을러.', '나는 실수투성이야.'라는 말로 자기 자신을 깎아내리고 개구리 취급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에요.
교육은 성장에의 욕구와 문제행동을 정확하게 구분하고 무엇을 지원하고 무엇은 지도해야 하는 지를 분명하게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왕자와 공주를 왕자와 공주로 키워내는 일, 개구리로 만들어버릴 저주를 쏟아내지 않을 노력- 그것이 부모와 교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교육의 기본이고 근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순응하라고 가르치면서 왜 능동적이고 자발적이지 못하냐고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이중구속에 빠진 공주와 왕자는 그들의 왕관을 벗어던지고 개구리로 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성장을 위한 욕구를 수용하는 것은 성장의 아름다운 면뿐만 아니라 성장의 못난 모습까지도 보아내어야 하는 일입니다. 노랗고 복슬복슬한 병아리가 볏이 멋지고 늠름한 닭이 되기까지는 아주 보기 싫은 모습의 중닭 시절을 거쳐야만 합니다. 그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아이를 키우며 아름다운 성장의 모습만 볼 수 있겠습니까? 우리 또한 그렇게 미운 시절을 지나 지금의 내가 되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18개월이 되면 떼를 쓰는 것이 옳고, 유치원에 들어가면 질투가 생기는 것이 옳으며, 사춘기가 되면 부모 보다 친구가 좋은 것도 정상적인 과정인 것입니다.
지나고 보면 순간의 추억입니다. 평생 모험과 사춘기를 겪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장의 욕구를 수용하고 "마음껏 행동해 봐라.", "마음껏 도전해 봐라." 하는 허가를 줘보는 것은 어떨까요? 공주와 왕자로 태어났었던 귀한 우리 아이들은 강력한 성장의 힘이 실린 소망의 화살을 마음에 품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려고 합니다. 부디 그 화살을 빼앗거나 꺾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안 본 눈 삽니다-
피시스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하더라도, 성장의 욕구를 보아내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는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이미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그거 그렇게 하면 안 돼."라는 말은 첫 경험의 설렘을 안고 뭐라도 해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꼴이 됩니다. 성장하는 이들을 대할 때에는 차라리 같이 그들의 시점으로 돌아가 곁에 서 주세요. "이렇게 하지 마.", "그렇게 하면 안 돼." 하는 말들로 성장을 방해하지 마세요. 성장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남의 성장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것이 됩니다.
유치원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낼 때 정답을 아는 아이가 있더라도 선생님의 질문을 끝까지 듣고 손을 들어 발언권을 얻은 다음 말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답을 이미 눈치챈 아이들은 스스로 입을 막으며 손을 높이 들어 올리고 엉덩이를 달싹거리며 소리 없는 외침을 질러대느라 안달입니다. 성장을 보아내는 일도 손으로 입을 막고 달싹거리는 엉덩이를 바닥에 주저앉히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는 일과 같다고 생각됩니다.
성장하는 자녀를 보아내는 부모도, 성장하는 직원을 보아내는 관리자도, 성장하는 내담자를 보아내는 상담사도 인생의 정답을 단번에 알려주고 싶어 달싹거리는 마음이 대단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장하고자 하는 그들이 직접 경험해 보고, 직접 생각해 보고, 직접 결과를 보아냄으로써 무언가를 배워가길 기대해 보는 건 어떨까요? 그들이 실패하고 다시 도전해서 성공해 내는 그 경험의 기회를 우리의 '쉬운 말'로 가로채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꼴을 그저 보아내 줍시다! 그것이 바로 성장의 욕구를 꺾지 않는, 공주와 왕자로 태어난 귀한 우리의 존재를 개구리로 만들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거긴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을
그래 넌 두 눈으로 꼭 봐야만 믿잖아
기꺼이 함께 가주지
이대로 이대로
더 길 잃어도 난 좋아
노를 저으며 그 소릴 난 들을래
쏟아지는 달빛에 Oh 살결을 그을리고
멋 옛날의 뱃사람을 닮아볼래-
잔나비 '외딴섬 로맨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