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알아차리기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저는 작은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는데, 한 번은 우리 어린이집의 선생님들과 직무 스트레스 관리 교육으로 원예치료 워크숍을 직접 진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기획한 활동에 따라 종이 화분의 표면에 자신의 원가족이 살았던 집을 회상하여 그려보라는 안내를 했더니 선생님들께서는 부지런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을 다 그린 후 자신이 그린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돌아가며 나누는데, 놀라웠던 것은 공교롭게도 많은 선생님들께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각자의 '나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선생님께서는 단풍나무 잎 사이로 반짝이며 햇빛이 내려와 눈부셨던 유년시절의 이미지와 그 단풍나무가 베어졌을 때 느꼈던 상실감으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또 다른 선생님께서는 부유했던 가정에서 자랐으나 모두가 일을 하러 나가는 바람에 낮잠에서 깨어 혼자임을 느끼며 외로웠던 경험을 이야기하였는데, 그때 정원에 있던 아카시아 나무의 꽃 향기가 외로움이라는 감정과 연결이 되어 지금도 아카시아 꽃 향기를 맡을 때면 외로움이 밀려온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밖에도 아름드리 벚나무, 담벼락 아래의 봉선화, 아버지의 자가용이 항상 주차되어 있던 나무 그늘 등 유년 시절의 집을 떠올리자면 나무나 꽃이 떠오른다는 선생님들이 많았습니다.
그 이야기들을 듣다 보니 J.M. 바스콘셀로스의 소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가 떠올랐습니다.
저 애한테는 오렌지나무가 사람이나 마찬가지예요. 조금 특별한 아이예요. 감수성이 굉장히 예민하고 조숙하거든요. -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중에서
가난한 가정에서 따뜻한 사랑과 허용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자라던 제제에게는 라임오렌지나무가 마음으로 소통하는 소중한 친구였습니다. 나무를 껴안고 나무와 대화를 나누며 어린아이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삶의 굴곡들을 삼켜내는 제제가 안쓰러우면서도 제제의 곁에 라임오렌지나무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제에게 라임오렌지나무가 있었다면, 저에게는 사철나무가 있었습니다. 우리 집과 옆 집의 경계 즈음에 키가 크고 나이가 많은 사철나무가 있었는데, 어린아이들이 타고 올라가 걸터앉아 있기에 적합한 수형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저는 늘 그 사철나무 위에 올라앉아 속이 빨간 사철나무 열매를 뽑아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별 것 없는 나무 위였지만, 일찍 나와 좋은 자리를 선점하고 앉는다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 마을을 지나다 보면 사철나무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지금 바라보는 그 나무는 어쩜 그리 볼품없고 초라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늠름하고 싱그러운 나무였었는데말입니다. 저는 이제 기억하지 못하지만, 제가 그 사철나무에게 했던 하소연과 자랑들을 나무는 기억하고 있을까요?
표준화된 공동주택에는 나의 나무가 없다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 하면 떠오르는 나무 한 그루쯤은 다 있는 걸까요? 우리에게도 그런 나무가 있는지 한 번 떠올려보세요. 우리 세대까지만 해도 주택에 사는 인구가 많았지만, 요즘은 대부분 공동주택에 거주하기 때문에 나무가 있는 마당을 보기 힘듭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는 초등학교의 선생님들께서 가정방문이란 것을 오셨습니다. 학생들이 자라는 환경을 일일이 다니면서 확인하고 부모님과 면담을 나누었지요. 선생님께서는 얼마나 다양한 주거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까요? 요즘은 모두가 획일한 모습의 아파트에 살다 보니 그 집만의 특별함은 중요하지 않고 몇 평형에 사는지와 값어치가 얼마나 나가는지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어린이집 평가를 받을 때면 저는 획일화된 평가지표가 우리나라의 모든 보육실을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며 아쉬워했습니다. 시대가 변할수록 다양성과 개별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평가지표에서도 그러한 점들이 점차 반영되고 있음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합니다. 사회와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표준'이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때가 아닙니다. 이제는 '다양성'을 외쳐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삶이 표준화되고, 생각이 표준화되다 보니 표준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의 삶이 부정당하고 표준에서 벗어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거부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품으려면 모든 것을 포용하고 허가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표준에서 벗어나는 사고와 행동을 하는 사람은 '소수'이기 때문에 허가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점차 우리 사회에서는 '아이'라는 존재도 소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이와 함께 새로 생긴 카페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가 2층을 궁금해하며 계단으로 향했지만 저는 아이에게 2층엔 올라갈 수 없다고 말하며 다섯 살 꼬마에게 '노키즈존'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아이가 카페의 2층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아쉬움보다, 웃고 떠들고 뛰고 구르는 아이들의 성장의 욕구가 사회로부터 거부당한 것이 부모인 저에게는 더 속상했습니다.
다양한 나무가 심겨 있는 마당 있는 집에서 자란 저에게는 라임오렌지나무가 있지만 저희 아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아파트에서 살고 있습니다. 마당이 없고 나무가 없는 바람에 저희는 아이에게 나무 역할까지 해주어야 합니다. 부모의 감정은 시시때때로 바뀌고, 부모의 체력과 시간 또한 언제나 한결같이 일관될 수는 없습니다. 부모의 보호를 받아야만 안전하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어린아이들에게 정서적으로 신뢰할만한 존재 하나가 있다면 얼마나 힘이 될까요? 제제가 라임오렌지나무에 올라앉아 삶의 고단함을 털어내듯이 우리 아이에게도 그런 나무 한 그루 있는 집에서 살게 해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저는 쉽게 누렸던 것들이 우리 아이의 세대에서는 특별한 것이 되어가는 현상이 서운하고 안타깝습니다. 누구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나무가 한 그루쯤은 있는 것- 그것을 우리 아이도 알게 해주고 싶습니다.
나의 나무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아도 연결되는 나무가 없다면 지금이라도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대학에 진학하여 유아교육과의 첫 전공수업을 들었을 때였습니다. 교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과제를 주셨는데, 캠퍼스 안에서 자신의 나무 한 그루를 찾아 정하고, 매주 그 나무를 찾아가 전체도 좋고 부분도 좋으니 스케치북에 나무를 그림으로 담아 오라는 과제였습니다. 제가 무슨 나무를 선택했고 어떻게 그렸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우리가 나무와 자신을 연결 짓고 세심하게 관찰하여 각자의 내러티브를 만들어보는 경험을 통해 자연 감수성을 키워보기를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그 깊은 뜻을 저는 헤아리지 못했고, 별 의미 없이 과제를 해 내기만 했던 것 같아 아쉽고 부끄럽습니다. 만약 그때 그 과제를 진정성있게 했더라면 나의 모교에는 언제나 찾아가 인사를 나누고 올 수 있는 좋은 친구 하나 남겨 놓을 수 있었던 것이었는데하며 아쉬워합니다.
캐나다의 식물학자인 수잔 시마드의 '어머니 나무를 찾아서'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인류가 인터넷으로 연결되어 있듯 숲에서는 나무들도 뿌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구 결과를 작가의 개인적인 삶과 연결 지어 써 내려간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식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식물과 연결되어 보라고 말합니다.
내 식물이라 부를 수 있는 식물과 인연을 맺기 바란다. 도시라면 발코니에 화분을 두면 된다. 마당이 있다면 뜰을 가꾸거나 마을 텃밭에 참여하기 바란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간단하면서도 심오한 일도 있다. 나무, 나만의 나무를 찾으러 가 보는 것은 어떨까. 내 나무의 연결망과 연을 맺고, 망으로 이어져 있는 근처의 다른 나무들과도 인연을 맺는다고 상상해 보자. 감각을 확장하며. -'어머니 나무를 찾아서' 중에서
마흔을 앞둔 지금, 저에게도 나 자신을 투영하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있습니다. 하나는 친정의 소류지에 뿌리를 내린 버드나무이고, 또 하나는 목련나무입니다. 버드나무는 그저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너울너울 거리는 것을 느끼며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고, 자목련은 아버지가 지어주신 내 이름 '두란'이 자목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 자신과 동일시되는 나무입니다.
버드나무는 소류지 가장자리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인지도 모르게 그 나무가 내 마음속에 들어왔습니다. 소류지에 안개가 자욱이 끼인 날이나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에는 나무가 걱정됩니다. 반면에 햇살이 반짝거리고 소류지에 야생오리가족이 여유롭게 노닐 때에는 버드나무가 행복해 보이고 더불어 나 또한 마음이 밝아집니다. 친정에 가서 소류지에 발을 담그고 있는 나무를 볼 때면 힘이 차오릅니다. 나무가 나에게 주는 것은 '아무도 모르지만 나만 알고 있는', '정확하게 내가 원하는' 위로와 격려입니다. 언어로 통역될 시간도 필요없이 나무와 나는 자연의 언어로 교류합니다.
저의 이름 '두란'이 목련을 뜻한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저는 목련을 볼 때면 누구보다 반가웠습니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목련은 뽀얗고 큰 봉우리를 누구보다도 일찌감치 피우고 잔인하게도 툭! 하고 한 순간에 떨어져 새카맣게 사그라듭니다. 친구들보다 일찍 철이 들고, 일찍 자리를 잡아가는 제 자신을 보면서 저는 제 삶의 뒤안길을 항상 걱정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두려움 때문인지 아직 마흔도 안되었지만 귀촌을 계획하고 건강하고 평안한 삶을 살겠노라 외치고 다닙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목련 나무의 잎사귀를 본 적이 있나요? 아주 푸르고 넓고 싱그럽습니다. 꽃도 예쁘지만 잎사귀도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꽃이 진다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꽃이 진 뒤 잎을 펼쳐 광합성을 하여 자신을 살찌우고 그늘을 만들어 사람들을 쉬어가게 해주는 잎사귀의 존재를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무가 되어 자연을 느껴본다
저는 수많은 자연 중에서 특히 나무를 좋아합니다. 나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습니다. 머리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나무같이 살아야지'하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온전히 제가 나무임을 느껴본 적은 없었습니다. 최근에 친정의 농장에서 주말에 놀러 온 도시의 가족들을 배웅하는데 갑자기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퍼부었습니다. 한여름의 태양이 여전히 반짝이는데 그 아래에서 굵은 소나기가 세차게 퍼붓는 특이한 날씨였습니다. 손님들에게 우산과 수건을 가져다주고 꼬마들의 안전을 살피느라 비를 맞았습니다. 그네가 매여있는 수피가 매끄러운 단풍나무 곁에 서서 비를 맞는데 그 경험이 매우 낯설었습니다. 빗줄기가 끊임없이 내 얼굴을 타고 내려가 물 웅덩이에 흘러들었습니다. 팔을 나뭇가지처럼 하늘을 향해 뻗어보는 순간 나무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오늘 날씨 참 이상하지? 무척 더웠는데 잘 됐어! 아주 시원하다!"
'나무는 비를 맞을 때 이런 느낌이구나!' 하는 생각이 번뜩였습니다. 비는 언제나 피해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피하지 못하면 이후에 감당해야 할 번거로운 일들이 늘어납니다. 하지만 나무에게 비는 자신이 통제하거나 피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아야 하는 것이 나무였습니다. 사실 어쩌면 사람도 그렇습니다. 병이 오면 병을 맞이해야 하고, 중요한 사람이 나를 떠나가도 붙잡을 수 없습니다. 아픔과 상처, 불편함을 대하는 나무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그 감정이 부정적인 것이든 긍정적인 것이든 나무는 모든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입니다.
종종 삶이 힘에 부칠 때, 나무에게 말을 걸어봅니다. '너는 이렇게 힘들 때 어떻게 이겨내니?'하고 물으니 나무는 말없이 허리춤에 난 옹이를 보여줍니다. 상처하나쯤 없는 나무는 없다고 말해줍니다. 하지만 싱그러운 잎이 있고 물이 차올라 부드럽게 휘는 새 가지가 있으니 살아갈만하다고 합니다. 더 높이 자라기위해 더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말해줍니다.
자연이 되어도 좋다
나무를 더욱 깊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무가 저한테 이런 조언도 해줍니다. '너도 딱 나만큼만 살아. 뿌리로 교류하고 잎으로 영양분을 만들고, 한 곳에 우뚝 서서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흔하디 흔한 산소를 만드는 일을 하더라도- 그저 푸르르고 곧은 나처럼만 살아.'하고 말입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입니다.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자연을 아주 가까이하며 살고 있지만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자연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끝이 없는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은 존재라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그것은 사고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우월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고능력이 있는 인간이 스스로를 슬기로운 존재라 칭하여 추켜세우고, 사고능력이 없는 식물과 동물, 자연을 깎아내립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 우월감에 사로잡혀 지구상에 쓸모없고 허황된 일들을 벌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탓에 인간은 괴롭습니다.
자연이라는 범주 안에는 동물도 있고, 식물도 있고, 생명이 없는 것으로 여기는 돌멩이와 구름도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도 있습니다. 쉬지 않고 재생되는 사고와 멈추고 싶어도 반복되는 행동으로 괴로울 때, 자연으로 스며들어 잠시 멈춰보는 것은 어떨까요? 나무에게 말을 걸며 다가가 그 곁에 잠시 앉아 보거나 서 있어 봅니다. 시간을 내어 돌이 되어보아도 좋고, 잡초의 뿌리가 되어 땅속에 가만히 안겨보아도 좋습니다. 잠시 잠깐 자연이 되어보는 경험을 통해 인생의 무거움을 좀 내려놓을 수 있다면, 자연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 것입니다.
저는 나무를 좋아하지만, 종종 길을 가다 개미를 발견하면 느끼는 경외감이 있습니다. '참 부지런히,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하는구나. 다른 존재의 역할을 탐내지 않고 다른 존재의 능력을 시기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하는구나.' 하는 것을 개미를 통해 깨닫습니다.
인간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대단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 덕에 자꾸 자신을 탓하며 살아갑니다. 조금 더 노력하면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기대 말입니다. 자신의 한계와 능력을 인정하고 만족한다면 굳이 돌이 되어보거나 나무가 되어볼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자연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너 자신이어도 돼' 하는 허가가 아닌가 합니다.
금지와 허가
금지와 허가는 쉽게 생각하면 반대말과 같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교류분석에서는 허가가 금지의 반대가 아님을 명심하라고 합니다. 금지는 '무엇을 하지 마라'는 메시지를 준다면, 허가는 '무엇을 해도 좋다'라는 메시지를 줍니다. '무엇을 하라'라는 명령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허가는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허가의 메시지를 받는 그 누구도 반드시 그것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해도 좋으니 네가 선택해." 하는 아주 따뜻하고 배려 넘치는 메시지입니다.
이번 화에서 '자연이 되어도 좋다'는 허가를 드렸습니다. 시간을 내어 자연으로 한 걸음 다가가 보는 것은 어떨까요? 자연은 똑똑 노크하고 묻지 않아도 언제나 그곳에 있습니다. 자연은 예약하지 않고도 언제든 방문할 수 있습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아주 너그럽고 인자한 존재입니다.
저는 아주 일 벌이기를 좋아하고 도전정신이 뛰어난 어른입니다. 아마도 저는 어렸을 때에도 아주 재빠르고 산만하고 호기심 넘치는 아이였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가만히 좀 있어라'는 야단을 듣지 못했습니다. 제가 언제나 머물렀던 자연은 무엇이든 내어주고 해 보라고 하고 언제나 그곳에 있어줬습니다. 하루종일 시냇가에 누워 냇물이 귀 옆을 흘러가는 소리를 들었고, 스치는 풀잎마다 뜯고 짓이겨 초록색 풀물에서 나오는 서로 다른 향기를 맡았습니다. 돌을 던지고, 큰 돌로 약한 돌을 깨트리고, 흙을 뭉쳐 공을 만들며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세월이 가는 줄 모르게 놀고 성장했습니다. 그 누구도 "이제 그만해.", "도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줘야 해?"라는 잔소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은 매우 허가를 잘 주는 교육자이자 상담사이자 부모였습니다.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스승을 자연으로 삼고 자연에서의 무한대의 허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연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슬기로운 존재가 아닌, 자연과 함께 공생하는 아름다운 존재가 되기를 원합니다. 인간보다 위대한 것이 자연이라는 생각 또는 인간이 자연보다 위대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알아차려 보기를 바랍니다.
자연이 되어봅시다. 나무도 좋고, 개미도 좋고, 돌멩이도 좋고, 파도도 좋습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자연을 찾아보세요. 그리고 그 자연을 잘 관찰하고 그와 같이 머물러보세요. 마음 깊은 곳에서 "그래도 괜찮아." 하는 무한대의 허가가 들려올 것입니다.
다음 화부터는 본격적으로 허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볼 것입니다. '나 자신이 되어도 좋다', '타인과 친밀하게 지내도 좋다', '세상과 연결되어도 좋다'는 허가를 순서대로 이야기하며 자발적이고 친밀하고 자각하며 사는 삶이 어떻게 인간을 자율적인 존재로 기능하게 해 주는가를 교류분석의 이론으로 소개할 것입니다. '자연이 되어도 좋다'라는 허가를 분류해 보자면 '나 자신이 되어도 좋다'라는 허가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다움이 무엇인지 궁금하신 분, 나다워도 괜찮을지 걱정되시는 분, 타인과 나의 삶이 자꾸만 비교되고 속상한 분들은 자연이 되어보는 경험을 통해 나 자신이 되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아보기를 권해봅니다.
[참고문헌]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J.M. 바스콘셀로스, 동녘
어머니 나무를 찾아서, 수잔 시마드, 사이언스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