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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패

처음이자 마지막 스탠딩

by 나땅콩



공연을 보러 갔다

3시간을 달려서 도착했는데 3시간을 더 기다려야 볼 수 있는 락 밴드의 콘서트였다

지난여름쯤에 예약을 했다

아들의 작품, 예약성공을 알리는 그의 음성은 몹시도 들떠 있었는데 행운이 따른 거라고 했다

나는 해보지 않은 일이라 "그런가 부다" 하는 심정이었다 심드렁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사뭇 장하다는 칭찬을 남겼었다


그런데 그날이다, 아들 말마따나 우후, 오고야 만 것이었다

나는 내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하고 싶은 일에 늘 픽사리를 놓았던 훼방의 신이 업무를 소홀히 하거나, 아니면 이제 그로부터 내가 소집해제 되었는지가 궁금해졌다

여러 가지 변수와 우여곡절이 생겨서 끝내는 못 가야 하는데 기어코 끌려가고 있는 이 느낌!

왠지 긴급한 연락이 와서 집으로 차를 돌리는 상상을 하면서 고속도로에 올랐다

뒷좌석에 아들이 물어왔다


가족의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대장정을 함께 하는 감개무량이 어떠냐는 흥분된 질문이었다

너처럼 좋아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좋아해야 하는지를 잊었다고 하려다가

"실감이 안 난다"라고 맨숭맨숭하게 말했다

대답의 수위가 맘에 안 드는지 출발할 때부터 소녀처럼 설레하는 아내에게 향한다

듣고 싶은 대답이 줄줄 나온다 둘의 합은 눈뜨고는 못 봐줄 소름이다 벌써부터 떨린다며 깨방정을 떤다

내게도 저런 마음이 있나?를 생각하다가 도무지 모르겠어서 말았다


아직은 해가 지지 않은 다섯 시, 말끔한 정장의 사내들과 해사한 피부를 가진 도시의 아낙들이

모둠으로 흐드러진 철쭉꽃 곁, 서늘한 봄바람에 기대어 걸어간다

새로 조성 중인 아파트 신축현장은 이미 굳게 닫혀있고 버스 정류장에는 얼굴에 비해 유난히 큰 눈을 가진 만화 캐릭터들이 동심의 시선으로 말을 걸어오는 해질녁이었다


지금쯤 우리 동네는 무엇을 하려나?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외국인 노동자의 피곤한 발걸음과 관문 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 읍내로 향하는 여중생들이 모습이 떠올랐다

같은 시간대에 사는 다른 모습들을 견주면서 느리고 듬성듬성한 시골에 적응한 나의 감각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정신없이 바쁘게 흔들림을 느꼈다

도시가 강요하는 속도감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늦었다고 재촉을 하기에 서둘렀다 한참을 걸었다

저 멀리 거대한 돔 경기장의 위용이 서서히 드러났다


스텐딩인데, 괜찮을까?


길잡이이자 공연의 전 과정을 이미 해석하고 있는 아들의 우려 섞인 물음이었다

좌석 없이 관람하는 방식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물결처럼 뒤섞여 어우러지는 외국의 공연 모습을 떠올리며 여태껏 그래왔다는 듯이 태연하게 말했다


남들이 하면 나도 하는 거지 뭐..


두 사람씩 줄을 지어 기다리라는 안내요원의 지시가 들렸다

사방에는 온통 사람들로 빼곡했다

저 멀리 석양빛이 비치는 계단을 넘는 행렬이 시야에서 사라지며, 천천히 입구로 빨려 들어갔다

이미 두세 시간 전에 도착한 사람들의 부지런함이 공연장 안으로 차곡차곡 모여드는 중이었다


좀 전에 등줄기가 훤하게 파인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자와 팔짱을 낀 반팔 티셔츠의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일행인 듯한 대여섯 명의 젊은 남녀가 어느새 앞에 서있었다

느닷없이 뒤에서 서너 명이 끼어들었다 일행을 합친 이른바 새치기였다

유니폼을 갖춰 입은 행사진행자가 이건 아니라는 단호한 영어로 몰염치와 무질서를 바로 잡았다


중국인들이라고 귀띔을 했다

어떻게 아느냐고 나는 아들에게 물었

몇 번의 해외여행 경험과 이런저런 소식통을 통해서도 이미 안다고 전했다


.... 그렇군!


나는 마땅히 할 말이 없어졌는데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화교라 일컫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내게 짜장면과 단무지를 내주고 주방께로 소리 지르는 이방의 언어가 거기 있었다

다르면서 다르지 않았던 그들, 계산대에 선 키 큰 주인아저씨는 여느 아저씨와 다르지 않아 보였는데 묘하게도 오르락내리락하는 억양을 구사하면 전혀 낯선 사람으로 변모했다

두 개의 문화가 공존했을 그 가족은 우리 동네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던 거였다


나는 실용의 기질과 대륙의 웅대한 정신을 끌어와 덧대며 두둔을 하려 했으나 아들은 듣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이상을 보고 아들은 현실을 직시하는 듯했다

족적을 잃은 나에 말들은 어쭙잖아서 도약할 힘이 없어 보였다


나는 눈앞에 펼쳐지는 현장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생각에서 나오는 건 가상이었고 있는 그대로는 생각과 무관하게 차례로 줄을 서서 홀로 묵묵했다

특권에 기대지 않았고 기회를 얻기 위해 한 발짝씩 전진했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장면들은 국에 절어있거나 낡지 않았다 어색하지 않았으며 음습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그들은 무던하게 기다렸고 관심을 나눴으며 호기롭고 건강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밴드의 초대에 응한 손님이며 공통의 관심사를 나누는 지인이었다

헷갈리는 건 오히려 간극의 사이를 택해 관찰하는 나였다

문득, 줄 서기가 너무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림이 길어지고 여기저기 풀썩 가방을 내려놓고 주저앉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앉으라는 아들의 권유를 무작정 버텼는데 지난번에 다친 다리가 결려왔다

혹시나 나와 같은 동병상련이 있을까 싶어서 또래이거나 연장자를 찾아보았다

없었다, 느닷없이 뭔가 꿍하는 소리가 났다


그럴 리가?


찬찬히 훑고 또 다시금 훑어보았다

멀리 흰머리의 한 남자가 보였다

머리카락만 하얀 나보다 젊은 사람 같았다

주섬주섬 검은 마스크를 꺼내 썼다

아내는 뭐 하냐고 물었는데 나는 "추워서.."라고 색하게 대답했다 나는 내가 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좀 미안했다

정중하게, 나는 내게 왜 런 행동을 하는지를 물었다


민폐...


자식이나 조카뻘들의 놀이마당에 끼어들어서 송구하다는 자책이었다 공연히 공연에 왔다는 공연한 참담함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대로 둘 수는 없는 일!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나는 나를 독려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뭔가 빠져나갔다

나는 내가 한 일이라고 힘주어 말했던 일들이

나와 상관없이 그렇게 되게끔 설정되었음을 돌아보았다

아내보다 좋아하는 담배를 끊었고

내 생애, 마지막까지 벗으로 삼겠다던 음주습관 마저 뜯어고치게 한건 내가 아니었다

세월이었고 나이라는 엄혹한 법이었다

생각이 거기에 다다르자

미세한 구멍이 뚫린 자전거 바퀴에 바람이 새어나가는 듯한 허전함이 밀려들었다

나는 여기에 불시착했거나 너무 늦게 도착한 외계인쯤일 거라는 소슬한 생각이 안타까움으로

번져갔다


사각의 앰프 수십여 개가 거꾸로 선 지네처럼 매달려 있었다

초대형 화면이 좌우로 펼쳐져 있었고 동그란 달 모양의 구조물이 걸려있었는데 무엇을 하는 것인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무대를 비추는 조명이 들어오고 객석의 휴대폰 불빛이 서서히 어둠 속에서 밝아졌다

이차원의 평면에서 봐왔던 공연장의 모습을 숨결로 들이마시며 가만히 순서를 매겼다

난생처음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었다


히잡을 두른 여인과 눈이 파란 서양인, 덥수룩한 수염과 매끈하고 갸름하고, 어둡고 밝은 세계각국의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다른 토양과 햇빛이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숙성시킨 살냄새가 싱그러웠

다양한 외모와 개성들이 절제된 소통으로 웅성거리며 어깨를 스치고 발을 구르며 대기 중이었다 같은 모습인데 조금은 다른 모두가 하나의 목적을 위해 기다렸다


지루하지만 시작만 하면 안 그럴 거야!


공연이 시작됐다

전담 도우미이자 든든한 안내자인 아들의 예언은 틀리지 않았다

네 사람의 음악적 내공은 실로 어마어마한 구경거리여서 잊지 못할 명품의 향연을 이어갔다

연주는 과몰입하지 않았으며

노래는 만석의 공연장을 벅찬 감동과 연대로 이끌었다


공연 중에 밴드의 리더는 관중들을 가족이나 친구처럼 세심하게 배려하며 챙겼다

마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과 미래가 우리 모두의 노력에 달려있음을 알리려는 거대한 시도 같았다

서로가 아픔과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나누고 지켜주는 인류애로 실천해야 한다는 소중한 진리를 예술을 통해 승화하고 있었다


공연이 끝났다

순서대로 출구를 향하는 발걸음을 옮기는데

오늘의 일등공신인 아들이 제안을 했다

불 꺼진 무대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싶다는 거였다 새삼스러웠으나 평소에는 이런 일이 없었기에 "까짓 거 뭐 그러자" 하고 사진을 찍기로 했다

혼잡함을 정리하는 안내방송이 목소리를 돋우는 한가운데 서서 우리 셋은 사진을 부탁했다


그러는 짧은 순간에 나는 보았다

동서남북의 출구로 나서는 무수한 점

아득히 떠나가는 사람들, 그 5만여 명의 사람들이 내는 함성과 환호가 마치 한 사람이 움직이며 내는 소리와 같았음을 떠올렸다

신(神)이 존재한다면 온전한 하나를 영속시키기 위해 모두의 다른 모습들에게 나누어 살게 하셨을 거라는 모종의 질서를 느꼈다


아침나절, 아내의 수다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긴 밤을 운전하느라고 곤한 잠에 빠진 베개 넘어,

안방문을 열고 게다가 심지어 스피커 폰으로

통화 중이었다


어머어머, 효자네 효자!


우리 집에서 발생하는 무슨 일이든 다 부러워하는 이웃 아줌마의 목소리,

순간 부스스한 잠결이 싸해지면서 뭔가 재빠르게 스쳐 지난다


그래, 어제, 그 사진!


그 사진은 그렇게 쓰일 것이다

셋 중에 둘, 그리고 끝내는 하나가 남아서 어제의 그 대단했던 봄밤을 기리는 용도로 남을 것이다

당연히 나는 거기에 없을 것이고 아들은 그때를 예비했던 것이다


고놈 참..


나의 생각이 거기쯤에 당도했을 때에 뭔가 짠해졌다 어떤 상실감이나 쓸쓸함이 밀려들었다

사실, 두 손을 들고 환호할 적에 오십견의 어깨가 따라주지 않아 슬그머니 손을 내려야 했었다

모두들 발을 구르며 뛰어오를 때 발목이 시큰대고

종아리가 아렸었다


이걸 참패라고 해야 하나?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스텐딩'은 화려하고 또 조촐하게 마무리되었다

이번 공연을 마치고 은퇴한다는 그들의 주름과 빛나는 눈빛이 떠올린다

어쩌면 은퇴란 더 이상 하고 못하고 가 아니지 싶다

할 만큼 하면 내려놓겠다는 의지이며 처음으로 돌아가려는 복원인지도 모르겠다

끝장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뭔가 아쉬움이 남는 일이겠지만 저무는 어디쯤에서 내려놓는 것은 홀가분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안 해도 되는 즐거움, 할 만큼 했으니 이쯤에서 그만두자는 포기의 자연스러움으로 기우는 것이 나이를 먹는 사람의 지혜가 아닐까?

암튼, 나는 지금껏 여백을 채우려 애썼으나 오히려 남겨두는 쪽으로 삶의 방향을 선회해야 할 거라는

전환을 생각해 본다



나는 아들에게 또 묻는다,

콜드게임은 있는데 왜 콜드 플레이의 뜻은 없는 거지?


자신들이 그냥 만들고 쓰고 그런 거라는 답글이 왔다 용서가 된다 나도 이렇게 이 글을 쓰면서 참패니 포기니 하면서, 우기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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