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준생 아들에게
*발 밑에 바다*
산다는 것이 생겨나는 건 늘 길 위에서였다
목동성당의 담벼락에서 논둑으로 줄을 그은 길은 109번 종점으로 이어져서 영남극장으로 가고 신트리 옹기종기 모여있는 판잣집으로도 흘렀다
잡화와 버스표를 파는 가게 맞은편, 대서소라 적혀있는 귀퉁이, 커다란 도장그림이 대뜸 서 있었고 두툼하게 니스칠 한 나무로 된 문 밖, 어른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렸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뭔가를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동사무소라는 데였다
멀리 태성연와 높은 굴뚝 주변으로 소리개가 날아다녔고 병아리가 자라는 마당, 빙빙 맴돌다 채가는 불길한 상상을 하다 보면
어느새 봄이 영글었고, 열린 창밖, 헐떡이는 대낮, 벌렁 드러누워 있는 뭉게구름이 몇 번의 비로 내려와 젖었다
이내 아쌀한 가을하늘이 새파랬다
벌판에는 집모양으로 쌓아 올린 볏짚들이 즐비했고 미꾸라지를 후벼 파던 논둑 도랑은 뻘건 철분끼로 자작했다 얼룩지는 기름이 유빙처럼 떠다녔다
중학교를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가끔씩 집을 나섰다 아마도 나는 본격적인 "나"로 나설 채비를 하려는 것 같았다
신작로가 아닌 이슥한 길을 걸어서 아주 먼 여행을 떠나는 예행연습을 했다
어둑어둑해지는 낯선 동네 어귀
집으로 되돌아가기에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염려와 정처 없이 방랑길을 떠나고 싶다는 격정이 부딪혔다
그쯤에서 캄캄한 어둠이 튀어나오고 그림자처럼 쫓아다녔다
삶에 대한 불안이거나 어설픈 애상이 비로소 혼자라는 것으로 눅눅해졌다 오히려 편안했다
뭔가 애틋하고 물기 어린것들이 차올랐다
안식, 깊은 밤의 초입이었다
나는 그때 몰랐고 또 알았다
내게 닥쳐올 감당하기 힘든 삶에 무게와 밀도, 그것에 도망치지 않고 감당해 보려는 어떤 의지가 두근대거나 망설이고 있었다 걸,
풍선에 입을 대고 불어넣는 푸른 입김이 "나"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부모와 선생님과
어른이라는 옹벽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 그들의 등뒤, 어떤 산맥의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는 차고 섬뜩한 것이었다 자나 깨나 부풀리는 풀무질이었다 어른들을 장악하는 질 나쁜 대기였다
만약, 지금의 내가, 그 시간대의 움푹한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내게 무슨 말들을 해줄 것인가?
탐탁지 않다 그 시절의 나와 달라진 게 별로 없어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때의 어른들도 지금의 나처럼 도리가 없었을 거라는 친근함마저 든다
왜 그런 걸까?
딱 한 번을 살아보고 인생의 이유, 가능성과 결말을 통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인생은 너무나도 다양하다
또한 일상 안에 비범함을 감추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도 든다 저무는 오후의 나이임에도 답을 찾지 못한 나는, 고정관념이 들여다볼 수 없는 눈으로
불투명한 심연을 응시하며 주저한다
급기야, 포기한다
아마도, 턱도 없이 모자라는 것이거나 마치 빛 속에 어둠을 감추는 기상천외하고도 엉뚱한 일일 것이다
의심을 못하도록 심어놓은 권태이거나 게으름일 수 있으며 무지를 향해가는 맹목적인 무한반복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완전체가 걸어놓은 빗장, 기밀사항이어서 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비좁거나 테두리가 없을 것이며
경탄의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 햇빛 아래 놓이면 죽는 "신성"쯤에 닿아있을 것이다
나의 삶은 출구를 찾는 일이었다
소풍 가서 하는 "보물찾기"인 줄 알고 살았다
숨겨진 보물은 보물을 갖고 싶다는 욕망의 위력으로 별처럼 윤이 나고 반짝였다
하지만 보물은 오래지 않아 다른 보물로 옮겨가는 기술을 지녔다 갖고 난 뒤에는 변질되고 탄식도 모자라 하찮아졌다
이렇듯, 대상이 주는 만족이란 실감하지 못하는 놈에게는 말짱 꽝이었다
나의 무지개다리는, 늘 원주의 둘레, 그것도 가장 먼 반대편에 있을 거라는 추측이었다
나의 시력은 늘 어디쯤을 얽매이고 있었는데
둥글게 뻗어나가다가 곡선의 끝, 너무 침침해서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리는 수평선에서 비틀거리곤 했다 눈을 비비고 초점을 맞추려 할수록 이상하게도 희미해졌다
수많은 원들을 중첩해서 만든 구체의 형상을 나는 상상할 수 없었다
벽너머는 가서 만져보기 전에는 확인할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었다
답을 원에서 찾았다는 충고는 그저 환상처럼 들렸다
흡사, 지구본의 모습 같았다
풀리지 않는 곤경의 시간에 재빠르게 되돌려 출구를 찾아보려 애썼으나
누군가 벌여놓은 번듯한 유물이었다 생각에게는 없다는 걸 모르고, 눈으로 찾는 것에 계약의 시간을 다 썼다
흡사 종이 박스 속을 뒤져 빵부스러기를 찾아보는 일과 같았다 검은 등껍질을 가진 어떤 벌레가 부지런히 옮기고 난 뒤라는 이해와
나는 결코 살아있는 벌레를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박스를 해체한 후에 실감했다
문제는 박스의 바깥이었다
빗방울이 닫지 않는 코팅의 외벽, 노끈의 어느 부분이 개미이거나 딱정벌레였다
같은 꿈들을 꾸면서 다른 해몽을 했다
종이로 접은 앞뒤면의 정체는 유동성을 지닌 하나의 개념에 불과했다 결국 더 많은 것을 뛰어넘어야만 뒤돌아보지 않게 되는 장애물 테스트였다
진실은 원이든 구체 든 간에 상관없는 발밑,
죽은 이의 들뜬 발아래, 허공에서 맴돈다
가장 소중한 보물은 항상 딛고 있는 발을 옮기는 순간 사라진다는 의심을 견딜 수 없게 됐다
그래서 이제야 좀 달라져 보인다
아주 가끔씩 꿈틀거리는 이 기이한 동행이, 나에게 행운이라는 생각이 생겼다
내가 어렸을 적에 사람들은 산 허리에 길을 내고 가리비 같은 집들에 얹혀살았다
그 좁고 구불거리는 골목길에는 반찬냄새가 나는 돌들이 굴러다녔다
내가 넘어가려는 곳은 칼산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머잖아 고척동의 어디쯤이라는 걸 알았다
높게 쌓인 안양천의 둑방은 인분천지였고
그 끝에 첨탑에는 밤마다 괴수의 눈알처럼 붉은 불빛이 깜박였다 서쪽으로 양화대교와 염창동이 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김포뜰을 지나 한참을 달리면은 강화도가 있다는 걸, 스무 살이 지나서야 보았다
그리고 건너편의 한 방향으로 가면 오류동, 송내를 지나 부평 그리고 남동공단을 지나 제물포 너머 통통배들이 연기를 뿜으며 연안부두를 내달렸다 거기부터가 바다인 거였다
하지만 아무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다
다르게 흩어져도 결국에는 한 몸으로 모이는 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태평한 바다
이유도 원인도, 필요 같은 건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는 처음이자 끝
동서남북과 아래와 위가 오가면서 온통 물로 하나라는 걸
그리고 날마다 내 몸 안에 물결이 일고 파도가 부딪치고 있다는 것을,
나의 유년은 망둥어가 숨을 몰아쉬는 어느 갯벌로 흘러들었다
나뿐만 아니었다 물방울은 어디에든 머무르지 않는 거였다 흔들리며 굽이쳤다 아래인 대지를 향해 축축이 적셔가며 생명이 꽃피웠고 지워졌다
나는 전부와 연결되는 씨앗, 기다리며 차츰 귀결되고 있었다
*내 속에 엔진 소리를 느껴 봐*
기억나니?
운전하기 전 본넷과 문짝, 트렁크와 번호판, 눈과 마주하는 여기저기에 다정한 눈빛을 주고 손끝을 문대면서 친해지라고,
핸들을 가볍게 좌우로 흔들면서 "잘 부탁해" 당부도 하고, 은근슬쩍 입맞춤이라도 해주면 도움이 될 거란 말도 했었지
알고 있니?
산다는 것도 그런 거!
지나 봐서 알잖아, 그런 날은 꼭 오는 거, 내가 낡아지고 형편없어지는 날들, 그럴 땐 그러면 돼, 자동차에게 해준 것처럼...
너와 동행하는 친구에 대한 일종의 예의랄까
네가 너라고 여기는 몸, 그리고 함께하는 운전자에게라고 해야겠지
흠, 그건 좀 복잡할 것 같아, 미루기로 하자
그냥 너를 이루는 "그것"이라고 말할래
그렇다고 대충 얼렁뚱땅 쉽게 가자는 얘기는 아니야, 오히려 나눌수록 혼돈을 가져오게 되잖아,
묶음이든 통째든 하나로 엮으려는 거야
난 이런 식이 좋다는 걸 최근에야 깨달았어
난 그래왔다
가위손처럼 보는 족족 잘라낼 줄 아는걸 능력이라고 여기며 살아왔지, 그래서 이젠 다르게
살아보려 해
막연하더라도 하나로 받아들이는 버릇을 들이고 싶어, 마치 가족과 살림살이를 모두 일컬어"우리 집"이라고 호명하는 것처럼 뭉뚱 거리는 거지, 그러면 다 한 몸이 되고 다 관계가 되고 쓸모 있게 되는 걸 알았거든,
그래, "사랑"같은 걸 말하려는 거야
끊지 말고 단단히 고정하는 강력한 접착력,
그러고 보니 그 말도 생각났다
네가 가장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하고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할 일은 너를 사랑하는 일, 그걸 먼저 해보라는 말을 언젠가부터 하고 싶었어
아마도, 누군가는 네게 이기적이라는 말을 할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멈추지 말고 지속해 나가길 바래
좀 더 깊숙이 다다르면 그런 말들이 넘겨짚지 못하는 어떤 몽글몽글한 기쁨과 질감 같은 것이 생길 테니까,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때
다른 너에게 작용하게 될 테니까,
내 삶의 실수는, 나라는 것을 결정하고 바깥에 마음을 뺏기는 일이었다
가진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마음이, 뿌리를 내리는 사이에 벌어진 사태더군
안과 밖은 기차처럼 연결돼 있어, 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한쪽만 보게 되어 있어서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반대로 가기는 힘이 들지
하지만 안과 밖은 서로 맞닿아서 완성되는 이상이기도 하고 실체이기도 하지
그래서 맘만 먹으면 순식간에 전체의 흐름이 바뀌기도 해
전혀 다른 국면이 펼쳐지는 신비로운 현상이지,
이쯤에서 어떤 역할 같은 걸 말해볼까?
사실, 나는 요즘 그 생각에 골몰해,
내 안에는 늙지 않는 "그것"이 함께 살고 있어서
가능한 변화 같은 거
내가 나라고 여기기 이전에 이미 있었고 잠들고 말고를 구분하지 않고 항상 함께하는 그 무엇을
너는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네
떼어낼 수도 없고 붙일 수 없는, 눈감아도 보이면서
쉼 없이 맥박 하게 하고 고동치게 하는 그것이 내게 있어서
나는 그것을 "다이아몬드"라고 부르려고 해
세상 어느 무엇보다 유능하고 견고한 나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지
다이아몬드를 기억해!
걱정과 불안이 몸집을 불려 너를 장악하려 하지만
가만히 따져보면 하루를 살아내기 위한
음식과 잠자리는 그리 큰 비용이 들지 않아,
그래, 나는 지금 최소한을 말하려는 거야
새로 태어 난 송아지는 겉의 물기가 마르면 걷기 시작하지, 새들도 계절 하나를 날개로 달아 날아오른다
그럼에도 사람은 유난히도 연약하고 느슨한 유년기, 오랜 돌봄의 시간을 보내야 하지 하지만 다른 뭍 생명과 크게 다르지 않아
이 세상을 살아갈 모든 능력은 처음부터 내게 있었다
나는 요즘 생각해
자고 나면 새로 솟는 샘물이 나였구나 하는 생각, 쓰고 나면 채워지는 건전지여서 자고 나면 충전이 완료되는 유기체의 삶에 대하여 기꺼워하지
반면, 만족을 모르고 살아온 것에 대한 후회와
마음 아닌 것이 없음을 간과하고 지나쳐온 "무심"을 미안하게 생각해
이 얘기는 여기서 멈추려 해
오히려, 내가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네 스스로 터득하는 너의 미래가 훨씬 더 너다울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야
하지만, 나는 현재와 현재 진행형의 진가를
강조하고 싶어,
과거는 어디에 있지?
현재의 싱크로율은 기억 속에서 사그라든다
있기는 했나? 하는 식으로 망각 속으로 스며들지
예컨대, 전재산을 기부한 어느 부자가 있어서 가난했던 시절에 시장통에서 사 먹었던 쑥개떡의 기막히게도 좋았던 맛을 떠올리려 한다고 치자
그 순간에 느꼈던 허기와 공복 그리고 충만을 그는 온전히 되돌릴 수 있을까?
어쨌든 간에 시간은 흐른다
나는 그 유장한 흐름 속에서 지나온 날들을 추억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원형 그대로 복원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버리기로 했어
어쩌면 가장 높은 가성비를 사는 비결은 지금을 사랑하며 사는걸 거야, 잊기 전에, 사라지기 전에 갖는 거지
아주 추운 겨울날, 붕어빵이나 호떡을 식기 전에 먹어야 하는 것처럼, 가슴 가득 베어무는 거..
나는 너에 심장소리를 느끼며 사는 삶을 추천해,
매 순간일 수는 없겠지, 그러기에는 할 일이 너무도 많아,
아주 가끔씩 고달프거나 맥이 풀릴 때 너의 심장의 울림에 집중하기를 바란다 한 번도 쉬지 않고 여기까지 너와 함께 달려온 심장에게 인사를 하고 안부를 하고 가벼운 마사지를 해주기를 해주는 시간, 그 에너지의 중심에 성성한 "다이아몬드"를 떠올리길 바래
삶이란 입구와 출구에 대하여 나는 이제야 눈을 뜬다, 의문문으로 된 입구를 두드리며 들어가서 느낌표의 출구로 나오는 방의 구조를 생각해
그리고 그러한 작은 방이 무수히 연결되어 있는
벌집의 구조를 지닌 한 무더기가 허공 어디쯤에
걸려있는 모습이 "나"일 거라는 상상을 하지
나는 그런 내게 부탁해!
생각은 그만하고 부딪혀 나가라고
생각이 실현되길 바라거든 머물지 말고 앞을 향해 걸어 나가라고, 행동하라고,
"내 속에 다이아몬드"는 나를 저버리지 않고 나를 도와줄 거라 생각해 그리고 오랫동안 함께 할 거란 기대를 하지
너를 위해서도 기도할 거야, 내가 나를 사랑한 만큼, 너에 "다이아몬드"또한 사랑으로 온전해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