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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오신 거예요?
네, 그런 거 같네요
다시 다녀오셔야 하겠네요!
음... 음........
그날의 자초지종은 이렇다
대설 관련 문자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본격적인 설 연휴가 시작되는 월요일부터 겨울하늘이 사정없이 눈덩이를 내려보낼 테니 알아서들 대비 잘하라는 내용이었다
늦은 저녁까지 포장과 배달을 마치고
내일 아침 한 곳만 더 다녀오면
이번 설 준비는 끝난다는 안도감에
모처럼 아내 곁에서 요즘 잘 나간다는 의료드라마를 감상했다
자정을 한참 넘는 일탈을 뒤로하고
한숨 자고 나니
동틀무렵에 뭔가 쓸 거리가 생각났다
주섬주섬 일어나서 몇 문장을 이어 붙이다가 보니
출발해야 할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현관문을 나서는데 부스스한 아내가 언제 일어났냐며 물었다
물건을 벌써 실은 거예요?
출발 전 마지막 기회는 그렇게 먼지 한 톨 남기지 않는 버스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또 있었다
동정저수지의 수면을 새하얀 크림케이크 운동장으로 넓혀 놓는 몽글몽글한 함박눈이었다
피반령으로 굽이치는 높고 낮은 능선에 내려앉아 세상의 예각들을 경외의 장관으로 변모하게 하는 거룩한 눈발이었다
이럴진대, 멜랑코리의 현신이 된 나는
이 외롭고 장엄한 겨울의 한복판을 멋진 음악과 동행해야 사람다운 사람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 이런 날은 그분이지!
하던 대로라면 당연히 내 늙은 피의 온도를 끌어올려 주는 황홀한 선율은 당연히 이매진 드래건스였겠으나
오늘은 일 년에 한두 번인 그날, 나는 핑크플로이드를 선곡했다
한음도 허투루 연주하지 않는 절제된 긴장, 묵직한데도 둔탁하지 않은 연주가 심금을 울렸다 수액을 끌어올리는 당산나무처럼 웅장한데 넘치지 않았다 허세를 부릴 만도 한데 담담했으며 안으로 속속들이 스며들었다 타오르는데 누구도 다치지 않는 불꽃놀이 같았다
그래서였다, 어질어질한 배달사고, 연합전선의 인연들에 에워싸여 평소에도 가물가물, 오락가락하는 정신줄을 아예 내려놓은 거였다
수면부족과 몽환에 잠이 깰 때쯤
"이건 아니야"하며 자책의 흰 눈이 목덜미를 차갑게 파고들었다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싣고 와서 순서대로 하차해야 할 물건들이 하나둘씩 확인했다
아득히 저 먼 출발지에서 손에 닿지 않은 명절상품들이 그대로 쌓인 채 내게 손가락질을 하며 키들키들 웃어댔다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쉬는 아내가 저만치 보이는 것만 같았다
삼매의 일곱 색깔 구름다리를 눈뜬 채로 건너온 삽시간이 뒤통수를 후려쳤다
어허, 정초부터 나는 뭐 하자는 거인가?
2
나는 중앙선 너머를 힐끔힐끔 살폈다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차간거리를 좁혀가며 귀성행렬의 자동차들이 촘촘하게 밀려들어 붉은 등을 켠다
나 원 참, 이러려고 서두른 게 아닌데...
좀 전에 달려갔던 오른쪽을 왼편으로 스쳐 지나면서 그 텅 빈 공간을 하얗게 메꾸는 흰 눈을 바라본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눈발이 차창을 덮는다
반복재생되는 후회의 장면들이 삐걱대는 소음으로 커지며 이내 편두통이 된다
순서들이 온통 비어서 나선형의 계단을 내려간다 새하얀 현재를 노크한다
정신을 차렸다면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까?
잠시라도 집중했더라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까?
과연 그런가?
핑크 플로이드와 간밤에 본 드라마의 인상적인 장면이 화들짝 놀라는 새들처럼 날아간다
내리는 함박눈이 일시에 정지하고 먼 길을 달리는 나와 자동차도 그날, 그 아침이 멈춰 선다
그리고 나는 가만히 적재함의 네 귀퉁이와 나를 연결한다
의식에 들어있는 이름과 취급주의와 박스 안에 들어있는 표현들이 어디서 왔는지를 골똘히 돌이킨다
아무래도 그것들은 태어나지 않고 부여된 것이다
그것은 나와 같은 처지, 형태를 갖춘 의미인데 자발적이지 않다 누군가의 손을 빌린 개념이며 서열이다
어쩌면 온 데를 모르면서 왔고 갈 곳을 모르는데도
가야 하는 전체의 과정에 개입하는 원리 같아 보인다 생명의 순환과 더불어 홀연히 나타나고 사라지는 물상의 질서에 깊숙이 관련되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내가 당황했던 순간과 발길을 돌려야 했던
궁극의 이유, 그 터닝 포인트에 내리는 함박눈과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를 회상하며 굴곡과 변화의 원점들을 정리한다
단단하게 굳어져 꿈쩍하지 않는 이익과 불리가 암반이라 할 만큼 두텁다
손해와 소득이 이인삼각의 경기처럼 다리를 묶고 달린다
유무의 허위와 소유와 무소유를 가늠하는 부피와 중량이 연계한다
어쩌면 존재와 생활과 보편타당함이 줄줄이 매달린 마이너 리그,
등번호 없는 유니폼을 입고 벤치에서 마냥 기다리거나 몸을 풀거나 강등이 두려워 쩔쩔매는 시합을 하거나 혹은 기회를 엿보고 있는 내가 거기 있다
꿈인가?
꿈인 것이 맞다
깨면 꿈이 아닌가?
글쎄다...
아무래도 무한이 상영되는 영화관
홀로이 졸거나 깨어있는 관객이 사는 곳이거나
형기의 끝과 시작을 알 수 없는
수인의 감옥, 마음속인지도 모르겠다
핑크 플로이드만 아니었으면 별일 없었을 텐데....
아무래도 꿈속을 산다 잠들지 않고도 꿈을 꾸는 현실을, 나는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