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눈사람을 부탁해!

by 나땅콩






서글퍼 보인다 했더니 그래서가 아니라 너무 고마워서 한참을 울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거라고 하는데 벌써 속 안의 말들이 뜨거워졌는지 눈시울이 붉어지고 숨이 가빠지는 것 같아 보였다


가끔씩 소화가 너무 잘 되는 것 같다고, 너무 일찍 배가 고파지고 무엇이든 맛있어서 잘 먹게 된다고 그가 말하기도 했는데 문득 그가 잘 우는 것과 소화가 잘되는 것이 연관성이 있을 거란 그 생각이 들었다


나는 좀 덜 움직인다면 소화가 느려지고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뜬금없는 제안을 하고 싶었으나

하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런 엉뚱하다 싶은 말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관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시하거나 비아냥거리거나 거리를 두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나는 나를 아프게 학습하였고 서열이 매겨지거나 계절옷이 되어 어둡고 공기가 통하지 않는 서랍에 수납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도 남들처럼 그럴 거라고 여겨지진 않았다

허나 이미 익숙했다 나는 내가 정한 선들을 넘지 않았고 완성된 형태를 갖추고 있었으며 단단히 여문 습관으로 내게 닿는 것을 미끄러뜨릴 줄 알았다


자꾸만 돌아다니고 싶어!


그가 내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움직이는 자신의 몸이 자신을 기분 좋게 만들어 준다고 말하고는 혼자서 웃었다

나는 멋쩍게 따라 웃어 보였다

왠지 내가 속으로 하는 말들을 들킬 거 같아서였다

내가 짓는 표정 너머에 어떤 현상을 그가 훤히 꿰뚫어 보고 있을지도 모를 거란 불안감이 어색하게 뒤를 따랐다

나는 감추려고 서둘러 물었다


남들은 시간을 돈으로 바꾸며 사는데

왜 그렇게 살지 않나요?


그건 감옥을 사는 거야!


단호하게 말하는 그에게서 창살에 갇혀있는 수인을 보았다

그는 덧붙였다 살다 보면 다시 갇혀야 하는 날이 올진 모르겠지만 벗어날 거라고

붙잡힌다 해도 그건 아주 잠시일 거라며

먼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한 산을 둘러보았는데

그에게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예감하는 것 같았다 어떤 불확실한 감정들이 내게 고스란히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와 함께 지내온 시간들을 헤아려보고 그가 내 곁을 떠나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죽음의 날을 떠올렸다

먼동이 트는 시간이었고 사람들은 잠들어 깨어나지 않았다 가만히 벽에 기대어 점차로 아지는 그가 아주 먼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신발 끈을 단단히 조여매고 등짐을 걸머지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흔들의자와 조금의 땔감만 넣어도 춥지 않은 벽난로를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누군가 삐딱하게 그려 넣은 듯한 눈썹에 흰 눈을 털어내며 낮지만 비장하게 말했다


소유한다는 것은 고독에 자리를 내주는 거야!


많은 것을 갖게 되면 평평해져서 오뚝이처럼 한자리를 맴돌게 된다는 그의 말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만선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은 아가미에 상처를 내지 않는 어부의 손을 만나야 다시 먼바다로 돌아갈 수 있는 거라며 하얀 땀을 닦았다

그의 손수건은 도무지 이 세상것 같지가 않았다


가진 자들은 유산이 많아질수록 불편함은 사라지고

행복해진다며 입간판처럼 미소 짓지만

눈에 보이는 것들이 커지고 흔해지는 것은 도리어 착시현상이라며

반비례의 진실을 감추기 위한 속임수임을 깨달아야 한다며

그림자처럼 길어지는 도둑들을 잘 살펴서 소중한

인생의 시간들을 낭비하지 말라고 했다


보이는 세상을 지목하는 손들은 몸통을 들키지 않으려고 항상 반대편에 환상의 나무를 심고 숲을 가꾸며 기다리다고도 말해주었다

'이건 꿈이 아닌 거야'하며 의심을 거둬드리는 순간이 잠자리에 들면

어느새 바람처럼 자연스러워진 손들이 다가와

두 눈을 들추고 귓속에 입김을 불어넣으며 꼭두각시로 데려간다면서 그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그들의 지식으로 고학년이 되고 채곡이 나이가 쌓여가고 어지럽던 것들이 이런저런 개념과 차이들로 분류가 가능해지는 적절한 시기가

좁은문을 열어 넥타이와 배지를 달아주며

번호가 적힌 문패의 방을 배정하고 출퇴근의 경로와 월급이 입금되는 통장이 깨지지 않는 몽상의 세상으로 들어온다고 했다


그러나 모든 과정이 끝나게 되면 더 이상 운동장을 바람처럼 뛸 수 없다고

비대해진 머리가 흔들려서 자꾸만 고꾸라지거나 마구 뒤뚱거리다가 마침내 의자에 앉아 있게만 된다고 우울해지는 그의 목소리가 말했다


더욱이 참을 수 없는 건 상처 난 개가 스스로를 핥지 못하게 목둘레를 감싸는 장치처럼

있는 그대로에 닿을 수 없는 관점들을 무한반복으로 강제한다는 것이었다


종소리를 들을 수 없게 종루로 오르는 계단을 봉쇄하거나 열매를 따지 못하게 담장을 둘러치듯이 사실들을 격리하고 은폐시키면

군중들 속에서 누군가 가시와 유리파편이 박힌 흉물스러운 그곳을 성공의 벽이라 찬양을 하고

부자들의 번쩍이는 구두라는 숭배가 시작된다며

긴 한숨을 쉬었다


나는 마루를 뒹굴며 올려다본 여름날과 도토리가 구르는 가을의 오솔길과 연탄재를 넣어 둥글게 굴러다니는

내 작은 동심 속에 눈사람이

무대를 내려와 초라한 어둠 속으로 떠나가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고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서로가 마주 보고 있는데 그럴 수는 없는 거라고 내가 나를 못 본다 해도 누군가는 나를 보고 얘기해 줄 거라고 뿐만 아니라 나의 모습을 비춰줄 만한 것들은 여기저기 널려있어서

옹달샘과 징검다리를 흐르는 냇물과 화장을 위한 크고 작은 거울들과 자동차 백미러가 저렇게 많은 곳을 비추고 있다고 일일이 짚어주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등을 보고 어디론가 가고 있어서 처음을 헤치고 나가는 원인에 대하여 궁금해하지 않기 때문에

사슬처럼 묶여있는 결과들이 한 방향으로 내딛는 거라며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리는 새처럼 높이 날아올라 온전한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데 발바닥에 닿는 촉감과

사방에서 비추는 안정적인 욕망들에 만족하고 있는 거라며

해와 달이 뜨고 지는 바닷가로 나를 데려갔다


물결치는 파도 위에 하얗게 드러난 낮달을 보며

저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리고 얼마나 강력한 힘인지를 느껴보라며 그는 나를 혼자 있게 했다

파도가 일렁이며 썰물과 밀물의 자리에 갈매기들이 날개를 펼쳐 날아들고 있었다


누군가에 지목되거나 표현되는 쉬운 말의 주어가 아닌 무엇에 대하여 갈매기들이 큰소리로 내게 묻는 것 같았다


너는 너 자신을 만난 적이 있니?


그는 내게 감각하는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소용돌이의 중심에 닿을 수 있을 거라며 말을 아꼈다

어떤 무엇도 방해가 되니까 훼방하는 것들과 거리를 두란 뜻인 것 같은데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이로움을 넘는 축복인데 함부로 독이 되었다거나

아군에게 향하는 대포알처럼 어이없고 무모 해졌다는 질책도 불편하게 느껴졌다

또한 관찰과 노력으로 이룩한 수많은 지식과 과학이 도리어 현실세계를 망쳤다는 그의 말들이 선동처럼 들렸다

지나친 편향이라서 독선에 빠진 거라고 그를 욕하고 싶어 졌을 때 그가 다시 말했다


전체를 재구성할 줄 아는

너무나도 커서 무모해 보이는

무수히 많은 감각들과 함께 노니는 젊은이들이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너처럼 늙어가고 있어!


나는 문득 쓸쓸함이 밀려왔다 그것은 해맑은 웃음과 경쾌하고 부드러운 그의 표정에서 가끔씩

묻어나던 그의 정이었다

잠시 후, 지금 내가 경험하는 혼돈과 허전함과 외로움이 당신에게도 보이는지를 물었다


돈과 물질 혹은 자본이 안겨주는 포만과 행복이 고독을 빼앗아 이제 당신 곁에 누군가를 배려해야 할 빈 의자가 그것들로 가득 찼음을

그리하여 어떤 경우라 해도 수용할 줄 아는 순수가

빛을 잃은 거라면서

이제야 연민이 되살아 나는 거라고 말해주었다


너는 너 자신으로 돌아가야 해!


더욱 고독해져라!


고독이라는 빈배로 떠나는 때론 슬프고 호젓한 여행길을

비록 남루하고 위태로워 보일지라도

나라는 찢어진 돛을 달고

그렇게 앞을 향해 나가는 거라고...


아름다움의 미로는 오래된 슬픔이라서

혼자일 줄 아는 외로움이 잣는 비단실이라며

그의 말들은 점차로 약해졌다


해는 이미 떠올랐다

그는 지난밤 파티를 즐기는 가족들을 창문 밖에서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가 어떤 위험을 예고했거나 부러움으로 오래 하늘을 올려 보았거나 잠시라도 함께 해달라고 애원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긴 밤 내내 나뭇가지로 박혀있던 그의 손이 내게 건네려던 마지막 조언이 무엇이었는지 가만히 떠올려보았다


경계에 서서 긴장하라!


외줄 타기의 밧줄처럼

끊기지도 늘어지지 않을 만큼 집중하라!


심장처럼, 소리를 위한 악기들의 현처럼 머뭇거려라!


이제라도 털모자를 씌워야 하나..

두꺼운 외투를 입혀야 하나.. 사람들은 내게 뭐라 할까... 눈이 녹고 있는데.. 해는 높아 그도 없는데...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에게 눈사람을 맡겨야 하나...

keyword
작가의 이전글눈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