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히 ‘또다시 비극을 본다’는 피로감보다는, 왜 이들의 목소리가 지금 다시 필요했는지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는 고통의 재소환이라 말하겠지만, 나는 그것을 생존자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쓰는 과정이라고 받아들였다. 연출이 다소 자극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바로 그 불편함 덕분에 역설적으로 나는 쉽게 외면하지 못했다.
제작진은 피해자들이 충분한 동의와 숙고 끝에 의도한 인터뷰에 참여했음을 강조한다. 그러지 못한 피해자들은 대역으로 인터뷰를 진행했음을 고지한다. 이는 트라우마를 강제로 드러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주체적으로 기록하고 역사 속에 남기려는 선택이었다. 연출 역시 일방적인 강요가 아니라, 충분한 협의와 명확한 목적 아래 합의된 결과로 보인다. 그래서 그들과 가족의 삶을 어떻게 무너졌는지, 왜 장애를 갖고 있는지, 범죄자가 될 수 밖에 없던 육체적, 정신적 피해와 트라우마를 직접적인 연출로 보여준다.
이러한 방식은 단순한 충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중이 결코 눈 돌릴 수 없게 만드는 장치다. 꼬꼬무나 벌거벗은 한국사 같은 예능과 토크쇼의 출연자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흘려듣던 비극에 공감하는 눈물이 아니라,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사건의 무게와 불합리한 시스템과 그 안에 기생하는 자들을 향한 분노를 생생하게 각인시킨다.
특히 이번 시리즈에서 ‘생존자’라는 호칭은 단순한 낙인이 아니라, 가해와 구조적 폭력 속에서도 끝내 살아남아 자신의 이야기를 증언하는 주체성을 보여준다. 그저 피해자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기록되는 용기 있는 증언자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이다.
한국 사회는 시간이 지나면 참사를 쉽게 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반복적 재조명은 피로가 아니라, 망각에 맞서는 최소한의 기억 투쟁이며, 그것이 곧 변화의 시작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상처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망각을 거부하는 증언의 자리를 만들어냈다. 불편할지라도, 그 불편함은 사회 구성원이라면 반드시 감당해야 할 몫이다.
또한 제작 과정에서 드러난 제작진의 고통, PD의 부르터진 입술, 가족 여행에까지 챙겨야 했던 전기충격기 등은 단순한 직업적 취재가 아니라, 자신 또한 위험을 감수하며 끝까지 싸운 기록이다. 남의 고통은 쉽게 잊히지만, 자신의 고통은 오래 기억된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추적하고 취재하고 마이크를 들이밀며 기록하며 집요하게 가해자에게 맞섰다.
만약 이러한 노력에 존경과 감사를 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저 행복을 당연하게 누리면서 스스로 안전불감증에 빠진 채 살아가는 것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