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모순이 쌓이다
세계대전과 사회문화의 변동 - 1
어느덧 20세기에 들어서섰습니다.
공장은 물건을 엄청난 속도로 많이 만들어냈고, 도시의 밤은 낮과 같은 환함을 가진채 사람들은 언제나 활기를 띄고 움직입니다.
미술도 이런 사회의 분위기를 따라 점점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기회를 얻어갔습니다.
인쇄기술의 발달은 알폰스 무하를 비롯한 삽화작가들의 탄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일러스트는 이제 상업적으로 사용될 정도로 보편화 되었는데요,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글자만이 아닌 그림도 인쇄물의 영역으로 진출한 것이지요.
말풍선과 상황에 따른 장면 구분이 이루어진 만화 역시 19세기에 이르러 인쇄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탄생하였습니다.
(만화라는 표현과 대중적인 그림책 이라는 요소로써 본다면 일본 역시 우키요에 라는 판화 장르로 상당한 지분이 있습니다.)
만화와 일러스트의 대중화는 미술로 하여금 상류층이나 미술관만이 가지는 특별한 것이라는 인식을 깨버리지요.
이러한 미술의 대중화는 대중의 관심사를 시시각각 반영하도록 하였고, 만평 등으로 등장하여 언론의 역할까지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세상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짐과 동시에 정치도 여러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영국, 프랑스 등의 일찍이 시민혁명을 겪고 의회 민주주의가 정착한 나라들에는 서서히 보통선거권이 확대되고 있었지요. 이와 함께 미술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주제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상업 선전지, 만화, 만평, 포스터, 심지어 춘화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지요.
미술이 대중화가 되어버린 이상, 대중의 관심사에도 미술이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에 관심을 가져주는지가 미술을 행하는 작가들에게 있어서 살아남기 위한 핵심 요소가 되었지요. 화가들도 돈벌고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앞서 언급했듯, 세상은 점점 진보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사회 분위기도 점점 자유로워졌고,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요...
20세기 초의 유럽은 민족주의와 늙은 제국들의 대립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광활한 영역을 지배하던 오래된 제국입니다. 그들의 영토 속에는 여러 민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19세기 이후로 유럽에 민족주의가 싹트고 한 민족이 주권을 가지고자 하는 흐름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지요.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은 지금의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일부의 폴란드인 등...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발칸반도와 중동의 여러 지역들에 걸쳐있지요.
지금의 유럽의 지도를 볼까요?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과 오스만이 지배했던 영역들과 현대 지도를 비교해 봅시다. 얼마나 많은 민족들이 저 두개의 국가에 모여있었는지 보이지요?
당연히 두 제국은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앞서 소개해드렸듯이, 예술은 이제 대중적인 주제를 다루게 되었습니다. 음악이던 미술이던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작품들이 나오게 됩니다.
사회가 이렇게 급진적으로 변해가고, 예술마저도 왕과 귀족을 떠나 민중의 폼에 안기는 시점에서는 제국의 분열은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무력으로 제국을 휘어잡으려고 했지만 그리스,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등의 발칸반도 국가들의 독립을 막지 못했습니다.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은 각 민족들에게 자치권을 약속하며 유화적인 통치를 보장했습니다.
그럼에도 민족주의는 늙은 제국이 감당하기 힘든 열풍이었나 봅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가 보스니아를 시찰하러 갔을 때, 급진적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이 사건은 사라예보 사건이라고 불리며, 1차 세계대전을 촉발하는 대사건이 됩니다.
사실, 사라예보 사건 그 자체만으로 곧바로 전쟁이 발발한 것은 아닙니다. 해당 사건을 두고,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측에 사과와 사건조사를 요구했고 어느 정도 잘 풀리는 듯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때, 러시아가 개입하여 세르비아를 편들게 됩니다. 러시아의 힘을 믿게된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를 적대하였고, 오스트리아는 같은 게르만족이자 동맹국인 독일에게 지원을 요청합니다.
러시아는 오스트리아를 굴복하기 위해 전쟁을 준비했고,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보호하기 위해 전쟁을 준비합니다.
전편에서 언급했듯, 독일은 엄청난 속도로 국력을 키워나갔습니다. 영국은 이러한 독일의 성장에 위협을 느꼈고, 독일을 봉쇄하고자 러시아와 프랑스를 끌어들여 협상국 이라는 동맹체제를 만듦니다.
독일은 게르만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동맹체제를 오스트리아와 결성합니다. (불가리아와 오스만 제국은 전쟁 발발 이후 참여)
전쟁의 위험 속에서 어느 한 나라가 동맹에서 빠져버린다면 외교적으로 신뢰를 잃게 되기에, 이후에 벌어질 참사를 알더라도 어쩔수 없이 전쟁을 준비하게 되는 상황이 되버립니다.
이런 동맹구도 때문에 세르비아가 저지른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려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갈등으로 시작하여 "모든 전쟁을 끝낼 전쟁", "대전쟁" 으로 불려지는 1차 세계대전으로 번집니다.
이에 따라 온 유럽은 전쟁에 휩싸여 버렸고 19세기 이전의 왕과 귀족의 전쟁을 넘어서 국가의 존망을 건 총력전으로 가게됩니다.
총력전 속에서 국민의 경제활동은 전쟁이라는 거대한 과업을 이루기 위한 부품이 되어 작동합니다.
옛날의 농업 사회에서는 분업의 개념이 없었지요. 그러나 산업화 이후로는 누군가는 단순노동을, 누군가는 고급 기술활동을 합니다. 산업화 이후의 복잡한 체계 속에서 각자의 역할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국가 운영은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이지요.
그말은, 징집병과 노동자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서 귀족의 사정에 따라 군대의 구성이 매번 바뀌었던 옛날과 달리 전선의 병사들과 후방의 노동자가 역할이 정해져, 전쟁의 과업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영역에서의 일을 함으로서 일정한 전력을 유지하는 상태가 되었지요.
모든 병사들은 민족주의와 애국심으로 무장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노동자들은 전선의 병사들을 지지해줄 후원자가 되는 진정한 국민의 전쟁이 도래한 것입니다.
이때, 예술가들도 민족주의, 애국심의 영향을 안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은 4년동안 온 유럽을 파괴하여 사람들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만, 전쟁 초기에만 해도 아직 19세기 이전의 기사정신과 명예와 영광이 가득한 낙관적인 사고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전쟁 초기에 예술가들은 조국의 승리를 확신하며 조국의 자랑을 그려내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은 독일의 자랑으로 여기던 비행선을 홍보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을 누비고자 한 시도는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비행선이 사실 더 일찍 시도된 방법이었지요.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은 대형 비행선을 개발해 내었고, 그의 이름인 체펠린은 비행선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기도 했지요.
체펠린은 많은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비행선을 개발해, 독일인들을 하늘로 올려보냈습니다.
그야말로 국가적 영웅이었습니다.
독일은 바다로 가로막힌 영국을 비행선을 전쟁에 투입하여 하늘로 날아가 폭격하였습니다. 바다가 보호해 주기에 자신들은 결코 공격당하지 않는다고 여긴 영국인들은 공황에 빠졌고, 독일에게 기술적으로 지고 있다는 의식을 가져버리고 말았지요.
군사적으로는 그다지 실용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만, 그 당시에는 대륙세력이 섬나라 영국을 공격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충격이었지요.
독일의 예술가들도 조국을 칭송하며 비행선 사랑에 자신의 미술적 재능을 보태주었습니다. 비행선은 국민적인 상징이 되어 영감을 주는 대상이었습니다.
전쟁에 대해 낙관적이고 낭만적인 사고를 하던 초기에는 예술가들이 자신의 혼을 불태워 선전 포스터들을 그려나갔지요. 하지만, 언제까지 그런 열정이 지속되었을까요?
전쟁은 점점 더 참혹해집니다. 이에 따라 예술가들도 점점 생각이 바뀌어 갑니다. 그것은 다음화에서 지켜보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