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터져버린 모순
독일은 1914년 전쟁이 발발함과 동시에 중립국인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국경을 통과하여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공략한다는 슐리펜 계획을 발동시킵니다.
슐리펜 백작은 매우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공격하고자 했습니다.
슐리펜은 해당 작전에 42일이라는 시간 제한을 걸어두고, 정확하게 작전 실행 역량을 계산해서 병사와 물자를 운송할 철도의 시간표를 칼날 같이 맞출 정도로 계획적인 공세를 계획했습니다.
하지만 동쪽에서는 이미 러시아와 전쟁 중입니다. 러시아군은 어떻게 할까요?
러시아와의 전투는 최소한으로 하면서 독일의 동쪽을 내주는 초강수를 두면서 프랑스를 정복하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리고 슐리펜 백작은 1913년 사망할 때까지도 프랑스 방면 공격군을 강하게 유지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슐리펜의 계획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선, 전쟁이 아닌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에는 공격작전이 늦어지는데 이 때에 독일군의 진격계획은 혼란에 빠집니다. 철도를 통한 작전능력을 미리 계산해 놓은 상태이기 때문이지요.
때문에, 독일은 군사적 이점을 포기하기 힘들어지게 되어서 대화를 통한 해결을 못하게 만듭니다.
두번째로는 너무 위험이 컸습니다. 러시아가 상상이상으로 빠르게 독일의 수도 베를린으로 진격해버린다면, 동쪽을 내주고 프랑스를 정복하기 전에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를 42일 안에 성공적으로 정복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42일은 독일이 스스로 정한 시간 제한이지, 프랑스가 이 42일 동안 독일에 계획에 따라서 그대로 무너져 줄리가 없습니다.
결국,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외교적 해결을 위해 작전 중지를 명령했습니다만, 독일 군부는 이미 계획된 치밀한 작전에 스스로 걸려들었던 점과 초기 계획에 따른 군사적 우위를 놓칠 수 없었던 것 때문에 황제의 명령에도 작전을 강행해버립니다.
처음에는 독일군이 빠르게 치고나가 프랑스군을 밀어 버렸지만, 독일군은 파리를 코앞에 두고 작전 목표인 파리 공략과 프랑스 정복에 실패해버립니다.
슐리펜 계획의 한계가 그대로 드러나 버렸지요.
그 상태로 프랑스 - 독일 국경에서의 4년간의 전투는 큰 변화 없이 사상자만 늘어나는 참호전으로 고착되었습니다.
당시의 기술로는, 참호를 파고 들어간 병사들을 살상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기병이나 보병이 직접 뛰어서 가다가는 기관총과 소총에 맞아 죽기 일쑤이고,
그나마 유효한 타격수단인 대포의 포격조차 땅을 파고 대피한 병사들을 확실하게 죽일 수는 없었거든요.
4년간 동맹국과 협상국 양측은 서로를 공격하기 위해 여러 전략 전술을 고민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참호를 파고 방어를 하는 쪽이 유리한 구도로 치고박고 싸웠습니다.
이때 많은 피를 보게된 결과, 예술가들은 전쟁 초기에 상상하던 기사정신의 전쟁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1910년대~20년대에 등장한 표현주의는 이때, 전쟁의 참상을 보며 전쟁이라는 큰 사건 앞에서 무기력한 인간의 깊은 고뇌를 화폭에 담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는 아르누보, 독일어권에선 유겐트 슈틸로 알려진 화풍이 당시의 유행이었던 시기에 미술을 배웠습니다.
그는 "다리파"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다리파의 다리는 말그대로 땅과 땅을 잇는 다리입니다. 인간의 정신세계와 미술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자는 취지에서 지어진 이름이지요.
다리파와 또다른 표현주의 파벌인 청기사파는 서로 교류하기도 하였지요.
키르히너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입대를 하게되었습니다만, 전쟁의 참상을 보고 두 달만에 신경쇠약과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으로 제대 하게됩니다.
이 때, 그려지게 된 키르히너의 그림은 어딘가 불안하고 뒤틀렸으며 고통이 보입니다. 야수파의 앙리 마티스와 같은 강렬한 색체가 쓰인 것도, 피카소와 같은 형태와 입체의 재조명 같은 구조의 변혁을 추구하지도 않았지만 그의 그림은 많은 것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전쟁의 참상, 그 속에서 혼란에 빠지고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군인의 모습과 뒤의 무력한 나체의 여성은 세상에 대한 환멸이 아니었을까요?
지난 화에서 밝게 다뤄진 선전화는 어떨까요?
전쟁은 모두를 피곤하게 만들었으며 예술가들 또한 전쟁의 끝을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희망찬 선전으로 시작한 예술은 이제 절박함으로 전쟁을 그려나가기도 했지요.
영국은 전쟁을 끝낼 희망을 전차라는 신무기에서 보았습니다. 거리를 전차가 순회하며 사람들의 주목을 끌며, 종군기자들은 전차가 전선에서 희망을 준다는 내용으로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탱크 열풍이 불어서 전차를 다루는 여러 상품들도 출시되었지요. 전차 장난감은 물론, 전차 모양을 한 가방이나 여러 상품들이 전쟁자금의 확보를 위해 판매되었지요.
전쟁이 끝나기를 바랬던만큼 전차가 그 역할을 해주길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실제로는 지난화의 비행선과 같이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독일군에게 간단히 격파당했지만, 국가적 자존심과 희망을 걸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죠. 군사적 활용은 아직 미숙한 단계의 전차였지만, 모든 영국인들의 소망은 진짜였습니다.
전쟁에 뒤늦게 참전한 미국의 경우,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지 않았기에 위와 같은 밝은 분위기의 선전을 실행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선전은 독일의 잠수함 작전과 치머만 전보 사건(독일이 멕시코에게 참전을 요구한 사건) 으로 후반에 참전한 미국이나 소극적으로 전쟁을 지원한 일본에서만 이루어진 희망찬 선전이었지요.
독일의 경우, 1916년부터 1918년 종전까지 식량부족 사태를 겪었습니다. 이것을 순무의 겨울 이라고 부릅니다. (Steckrübenwinter)
전쟁 이전, 독일은 1/3의 식량을 해외에서 수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시작과 함께 식량의 수입은 중단되었고, 독일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했지요.
1916년, 마침내 독일의 식량 비축고가 바닥났고, 감자나 순무로 끼니를 해결해야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이 시기에는 겨울을 이겨내자는 절망적인 선전으로 어떻게든 승리를 향한 전쟁의 북소리를 울릴 뿐이었지요.
이는 문학에서도 드러나는데요,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 에도 자세히 나오는 장면입니다.
국민들은 물론, 전선의 장병들 마저 순무를 그럴싸하게 갈아 만든 빵같은 덩어리에 순무를 이용해 만든 잼을 발라서 먹는 사태가 벌어져, 프랑스군 참호를 점령하자 음식 부터 찾는 해프닝이 그 예시이죠.
굶주리는 독일군의 이야기는 2022년 제작된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소설 원작 영화, <서부전선 이상없다.> 에서도 등장하는 장면이지요.
선전화 조차 이런 어려운 유럽의 상황을 표현하는 작품들로 넘쳐나게 되었고, 순수 예술가들도 전쟁을 혐오하며 다양한 고뇌가 담긴 작품들을 쏟아낸 것을 보면, 1차 세계대전은 사람들의 사고를 완전히 바꿔놓은 사건임에는 분명합니다.
전쟁에 대한 혐오와 사회체제에 대한 의심이 퍼졌으며 이는 미술에도 반영됩니다.
이후에 다루게 될 표현주의는 그런 사회의 불안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게 됩니다.
이전 시대인 "벨 에포크"의 문명의 희망은 이제 의심받으며 기술의 발전이 인간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의식이 피어났으며 모든 국민이 참여하는 전쟁, 총력전의 도래는 사회 계층을 가리지 않고 반전 사상을 가지게 됩니다.
패전국인 독일,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 그리고 오스만 제국 등의 황제들은 몰락하여 모두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러시아는 공산혁명으로 황제 일가가 몰살당하고 소련이 탄생하지요.
이런 왕족들의 몰락은 구체제의 잔재가 완전히 붕괴되었음을 뜻합니다.
여성들의 경우, 남성들이 전쟁터에서 죽어갈 동안 공장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기존의 여성들은 집에서 가정을 지키는 존재였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여성들도 충분히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전세계에 보여주었습니다.
아직 완전한 남녀평등이 온 것은 아니지만, 여성의 권리가 존중받게된 것은 이때 부터였습니다.
물론, 1차 세계대전 만이 여권 신장의 전부는 아니지만 총력전 체제 속에서 그 역할을 해내었다는 것은 보수적인 남성중심 사회에 충격을 주기엔 충분했지요.
대전쟁 속에서 국가가 국민들을 부품으로 사용해버린 댓가로, 개인주의가 확산되며 국가가 어디까지 개인의 삶을 파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활발했지요.
이렇게 보니깐 1차 세계대전은 많은 영향을 끼쳤지요?
사회문화적으로 1차 세계대전은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며 미술계 역시 대대적인 개편으로까지 이어지는 큰 사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