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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현 Feb 24. 2024

다다이즘

기존의 모든 것을 부정하라!

다다이즘은 1920년대에 일어난 미술운동입니다.


다다(da da)라는 말의 어원은 많은 설이 있지만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다다 라는 말은 아무 의미 없지만, 그 정신을 표현하기 위한 의도적인 활용이라고 보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다이즘은 허무주의, 회의주의 등이 주축이 되어 (모순적이지만) 반 예술, 반 도덕, 반 규범 등을 주장했습니다. 기존의 것들은 고리타분하다는 이유로 비난하고 야유하였지요.


다다이즘은 스위스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요, 1차 세계대전 동안 중립국 스위스는 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었고 그곳에 정착한 예술가들은 전쟁의 화마에 휩싸인 세상을 조금 떨어져서 보게 되었습니다.


아방가르드 라는 말과도 어느정도 공통점이 있지요.


아방가르드 Avant-Garde 라는 말은 전쟁터에서 가장 앞줄을 담당하는 부대를 의미하는 전위대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급진주의자들을 의미하게 되었지요.


이것이 미술용어로써의 아방가르드를 전위예술 이라고 번역하는 이유가 됩니다.


아방가르드가 기존의 정형미, 서사로 가득한 기성미술을 부정하는 경향 그 자체를 의미한다면 다다이즘은 거기에 허무주의, 회의론 등으로 사회의 질서적인 모든 것을 부정하는 모습이 담겼지요.


마르셀 뒤샹, <샘> 1917

마르셀 뒤샹의 <샘> 이라는 작품은 그저 시중에 유통되는 소변기를 하나 들고와 미술관에 전시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미술에 새로운 견해를 형성시켰지요.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물건이라도 미술관이라는 공간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 것일까요? 이런 전시는 창작일까요, 아닐까요? 이런 뒤샹의 시도는 많은 철학적 해석을 내놓게 되며 예술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게 분화되는 계기가 됩니다.


뒤샹은 자유로운 전시를 지향한다는 당시의 미술전의 슬로건을 시험하기 위해 <샘> 을 출품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뒤샹의 <샘> 은 허락 받지 못하였고, 이에 실망한 뒤샹은 기존의 미술계를 야유하고 모독하게 됩니다.


마르셀 뒤샹 <L.H.O.O.Q>

뒤샹은 샘 외에도 <L.H.O.O.Q> 라는 것을 내놓았습니다. 이 제목을 프랑스 식으로 읽으면 "엘.아슈.오.오.뀌" 라고 읽히는데요, "그녀의 엉덩이는 뜨겁다" 라는 말과 비슷한 발음이 나오게 됩니다.


<L.H.O.O.Q> 는 모나리자가 인쇄된 엽서에 수염을 그려넣고 그런 이름을 새로 붙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행위는 예술과 예술가가 가지는 전통과 권위를 완전히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술가가 화폭에 기존에 없는 것을 새로 그려나가는 것만이 창조적이고 천재성을 드러낸다는 그러한 믿음에 대한 맹렬한 공격이었지요. 모나리자가 고전의 걸작으로 칭송받는 유명세를 생각하면 이것은 엄청난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다이즘은 이러한 뒤샹의 파격적인 선전과 같이, 반 예술적이고 반 사회적인 성향을 띄고 있습니다. 역시 1차 세계대전이 문명의 잔인성을 보여준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영향으로 생겨난 하나의 흐름이었던 것입니다.


마르셀 뒤샹 1887 ~ 1968

일상 속의 오브제를 작품으로 가져와 전통 미술 속의 선입견을 깨버린 선구자 마르셀 뒤샹.


오브제란 무엇일까요? 원래는 사물, 개체 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미술에서는 기존의 용도에서 분리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대상물을 의미하지요.


기존의 용도에서 분리해낸 물건들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그 물체를 바라보는 잠재적인 심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기존의 용도는 잊고 새로운 용도를 고민하게 만듦니다.


이러한 고민을 유발하는 것이 아방가르드 작가들이 노리는 것이었지요.


다다이즘은 허무적 이상주의와 반항을 내걸었는데, 이는 예술이 가져야 하는 의식적 관례들을 사라지게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합니다.


예술이 예술로써 그 가치를 반드시 평가와 자격 검증을 해야하는 것일까요?


다다이즘이나 아방가르드 작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다이즘은 예술과 일상을 더 가까이 할수 있도록 이끌은 공로가 있습니다. 미술은 표현, 재현 이외에도 형식적인 요건을 다루는 제도의 관점에서도 볼 수 있거든요. 다다이즘은 미술을 어떻게 형식으로 평가를 할수 있는 것이냐는 공격을 하였지요.


이에 따라, 이후의 미술관의 구성은 상당히 변화하였습니다. 기존의 예술의 요건을 갖춘 것이라고 여겨지던 정형미의 작품 이외에도 기존의 역할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 오브제들이 등장하였고 다양한 조형물들을 볼 수 있게 되었지요.


그러나 다다이즘은 모순에 빠집니다.


허무주의, 회의론 등으로 시작한 운동들이 가진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우선, 뚜렷한 목표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운동을 추진할 구심점이 약하다는 것이지요. 사회를 부정하고 기존 예술을 부정한다는 메시지는 좋지만, 누가 그것을 대표하냐는 것이지요.


대표자가 나서서 결집을 시도하면 그것은 다다이즘의 허무적 가치에 스스로 반하는 새로운 사회의 구성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다다이즘은 반 예술, 반 사회 라는 가치에 모순되기에 의미를 상실하고 맙니다.


그리고, 여러 작가들이 다다이즘 운동에서 영향을 받아서 참신한 시도들을 뒤따라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미술의 주류로 자리잡으면 이 또한 반 예술이라는 가치에 모순되는 현상 아닐까요?


다다이즘을 이해하기는 힘듦니다. 다다이즘은 끊임없이 연구되고 있으며, 다양한 의견들을 가지고 평가합니다. 사실, 그렇게 미술을 보는 관점을 다양하게 만드는 것이 다다이즘의 목표이기도 했으니 성공했다고 해야할까요...?


생각해보기

1. 미술관에 전시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을까?

2. 오브제들은 어떻게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할까? 오브제는 때로는 "저게 어떻게 미술이야?" 라는 의심을 만들지요.

3.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아방가르드. 새로운 것을 추구하다 보다가도 결국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리고 마는데, 이럴 경우엔 그 작가는 다시 옛것을 추구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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