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원의 재해석
는 입체라는 개념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 미술사조 입니다.
사람은 정면으로 물체를 바라볼 때, 그 물체의 단면을 보게됩니다. 그 사물의 뒷 모습은 몸을 움직이지 않고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입체주의는 그런 단편적인 모습이 아닌 사물을 전개도와 같이 펼쳐서 옆면과 뒷면을 모두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입체주의가 내세운 입체는 우리가 보기에 입체적이라고 느끼라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면을 보여주겠다는 의미의 입체였지요.
입체주의의 거장은 역시 파블로 피카소(1881~1973) 이겠지요.
피카소는 입체주의가 추구한 이상에 가장 부합하는 그림들을 작업한 화가였지요.
피카소의 그림들을 보면 드는 생각은 아마, "왜 코가 저렇게 되어 있으며 귀는 왜 저기에 붙어있는 것이지?" 와 같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피카소는 결코 못그려서 그런 그림을 남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피카소는 10대 시절, 이미 그림의 천재였습니다. 미술을 지망했었던 피카소의 아버지 호세는 이렇게 말하였지요.
"네가 내 꿈을 이루어 다오."
피카소는 예술 학교에서도 우수한 점수로 평가 받았으며 월반을 해가면서 남들보다 더 어린 나이에 미술을 배웠습니다.
본인 스스로도 "나는 12살 때, 이미 라파엘로가 되었다." 라며 다소 오만한(?) 말을 하기도 했지요.
이미 고전적인 미술은 마스터해서 생겨난 허무함인지, 피카소는 성인이 된 이후에는 "어떻게 평면의 화폭에 입체물의 여러 특징을 한번에 다 보여줄 수 있을까?" 를 고민하고 실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피카소가 이런 그림을 그리고자 결심한 20세기 초에는 사실 많은 도전들이 있었고, 피카소도 그 중 한사람 이었습니다. 전편에 다룬 미래주의나 다다이즘 역시 사회의 변동에 따라 사람들의 의식 변화에 맞추어 생겨난 새로운 시도들이었습니다. 입체주의 역시 당시의 사회 변동에 따라 탄생할 미술사조였지요.
해당 작품을 보시면 기존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여인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받게 됩니다. 모자는 찌그러진 것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으며 이마의 주름은 뒤죽박죽입니다. 얼굴을 감싸는 두 손을 보세요. 어딘가 기괴하게 꺾여있음은 물론이며 가려져야할 코와 입은 관객에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나올 수 없는 모습입니다만, 피카소는 모든 방향에서의 입체를 담아내고자 하였기에 이러한 그림이 나왔습니다.
어떤 여인은 다리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보기 힘들고 어떤 여인은 등을 돌린 건지, 앞을 보는 건지 모르겠지요? 얼굴은 다들 전통적인 명암법과 자연적 묘사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굉장히 어색한 이 그림은 1907년에 처음 공개되었을 때,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여신에 대한 묘사도 아니고, 인간의 육체적 건강함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여인들은 여러 해석들을 내놓게 했습니다.
"저 여인들은 창녀가 아닐까?", "불쌍한 사람들일까?" 등 많은 의견들이 오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개할 그림은 <게르니카> 입니다.
<게르니카>는 스페인의 지역 이름입니다. 1936년 스페인에서는 내전이 발생했는데요, 좌와 우의 정치적인 대립이 한계를 맞이하여 벌어진 전쟁입니다. 여기에 히틀러의 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우익 진영을 지원하게 되는데, 독일군이 비행단을 이끌고 게르니카 라는 도시를 폭격해서 잿더미로 만듦니다.
피카소는 이 사건에 충격을 받아 349.3cm × 776.6cm 라는 거대한 사이즈의 그림을 그려냈습니다.
게르니카의 참상을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냈는데, 등장인물들의 비극은 검은 바탕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피카소의 고향은 스페인입니다. 고향이 전쟁으로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것은 그에게 있어서 큰 비극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 장교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이 게르니카를 그린 화가요?"
그리고 피카소는 이렇게 답했죠.
"아니요, 게르니카는 당신들의 작품입니다."
피카소는 전쟁을 반대했으며 2차 세계대전 후에는 프랑스 공산당과 협력할 정도로 민족주의, 군국주의를 증오했습니다.
1930년대, 당시의 유럽은 긴장감이 팽팽하게 돌던 시기였습니다.
파시즘이 독일과 이탈리아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의 종주국 소련은 갈수록 강대해졌습니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영국과 프랑스는 지난 대 전쟁의 악몽을 떠올리며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청산과 이념 대립 속에서 전쟁의 그림자가 몰려왔으며 스페인은 그러한 유럽의 혼란의 축소 판이었습니다.
1930년대의 스페인 정치 사정은 매우 복잡했습니다.
스페인에는 다양한 정치 세력들이 존재했습니다.
이사벨 2세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왕당파와 그렇지 않은 왕당파, 군부, 기업가 종교인, 중산층, 노동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정말 다양한 세력들이 서로 목소리를 높이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우익 진영은 국민전선을 결성하고, 좌익 진영은 인민전선을 결성하여 각자 1936년 선거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충격적이었고, 1936년 선거는 내전의 방아쇠가 되었습니다.
국민전선은 득표 46.48%, 인민전선은 득표 47.03% 를 얻었습니다. 양측은 거의 비슷한 득표를 하여 팽팽했지만, 당시 스페인은 의원을 지역구 단위로 선출하였기에 총 득표와 다르게 의석이 배정될 수 있었습니다.
지지율은 양측이 거의 같았음에도 의석은 국민전선이 131석, 인민전선이 285석을 배정 받았습니다.
지지율에서 밀리지 않았음에도 벌어진 국민전선의 충격적인 패배는 전국적인 시위를 유발하였고, 정부는 이를 진압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스페인군은 국민전선 파벌과 인민전선 파벌로 나뉘어 서로에게 총을 겨누게 되었습니다.
크게 본다면 국민전선과 인민전선의 전쟁이었습니다만, 국민전선과 인민전선 모두 내부적인 문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우선 국민전선 먼저 보겠습니다.
1833년, 세 살의 나이로 즉위한 이사벨 2세 라는 여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남성이 군주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시대였습니다.
선왕, 페르난도 7세가 여성도 왕위에 오를 수 있다고 공언하였기에 이사벨 2세는 여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카를로스 백작은 여왕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여 여러 차례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군주제를 지지하는 왕당파는 이사벨 2세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파벌과 인정하지 않는 "카를로스파" 로 나뉘었습니다.
국민전선에 가담한 군부는 여러 장군들이 저마다 자신의 계급을 내세우며 지휘권을 두고 싸웠습니다.
이념적으로는 전통사회를 지향하는 종교인, 농부 세력과 근대 정치 체제를 지지하는 세력이 서로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면, 인민전선은 어떨까요?
인민전선 역시 공산주의 체제를 주장하는 노동자들과 의회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공화주의자들이 정부의 주도권을 놓고 싸웠으며, 무정부주의자들은 자체적인 민병대를 이끌고 해방구를 선언하여 공동체를 만들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양측 모두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국민전선 측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은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전권을 위임 받아, 내부 분열을 해결하고 인민전선을 격퇴하는 데에 집중했습니다.
프랑코 장군은 군대를 휘어잡고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아가며 전쟁에 임했고, 1939년에 전쟁을 국민전선의 승리로 이끕니다.
피카소가 경악하며 그린 <게르니카> 는 마을의 이름입니다. 프랑코를 지원하며 개입한 독일군, 콘도르 군단은 게르니카를 폭격하여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공군은 전쟁터에서 군인과 군인 간의 기사도적인 결투와 같은 방식으로 싸웠습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습니다.
민간인을 폭격하고 상대편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서 적들의 전쟁 수행 능력을 꺾을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민간인은 노동자가 되어 군대가 쓸 무기를 생산하니, 공군의 표적이 된다는 것이 주요 논거였습니다.
스페인 내전은 전통과 근대, 기업과 노동자, 군부와 민간정부, 종교와 반종교 등 다양한 의제를 두고 벌어진 내전입니다.
스페인 내전은 산업화가 이루어지며 생길 수 있는 모든 모순이 한 국가에서 축척되어 폭발한 것입니다.
이념이 엇갈리고 증오가 증오를 낳는 전쟁. 군인들만이 희생되는 것이 아닌, 민간인까지 피해를 보는 전쟁.
2차 세계대전을 표현할 수 있는 수많은 특징들이 스페인 내전에서 나타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