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술에 대한 격하 운동
퇴폐미술과 권위주의 미술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독일은 1919년 채결된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협상국으로부터 막대한 징벌을 받게 됩니다.
영토의 10%를 이웃나라들에게 할양할 것.
프랑스 - 벨기에 국경에 군대를 배치할 수 없다.
20년 안에 1,320억 마르크를 금을 기준으로 배상.
징병제 폐지와 상비군은 10만명 이상 보유 금지.
전차, 항공기와 같은 중화기 보유 금지.
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독립한 국가에서 패전국으로 수출하는 물건에 대해서, 그 물건의 수입을 거부할 수 없으며, 무관세로 수입해야 한다. (패전국이 독립한 국가로 물건을 수출할 때 독립국은 패전국산 물건에 대해서 관세 부과 가능.)
등등의 국가로서의 주권을 상당 부분 침해하는 조항들로 독일을 쥐어짜게 됩니다.
모든 독일인이 평생 일해서 빚갚는데 헌신해도 갚아질까 한 수준의 배상금을 요구 받자, 독일은 석탄, 건물 자재 등으로 현물 배상을 실시했고 동시기에 이뤄진 막대한 현금 발행과 더불어 역사상 기록에 남을 물가 상승을 겪습니다.
1919년, 1920년, 1921년. 이 3년을을 지내는 동안 물가는 1조 배로 올랐습니다. 무엇을 사고자 해도 수억 마르크를 지불해야 하지만, 다음날 아침 해를 보게되면 그 가격은 전날 보다 몇배로 뛰어있는 나날이었습니다.
모든 독일인들의 삶은 급격히 나빠졌고 모두가 불행했습니다. 협상국의 강요와 여러 요인으로 인해 모두가 불행해진 탓에 사람들에게는 증오할 대상이 명확했습니다.
이때, 히틀러와 나치당이 등장합니다.
인종적 오염을 거부하는 국가가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국력은 방어가 아닌 공격을 위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앞에 독일이 있음을 알고, 독일은 우리와 함께 행진하며, 독일은 우리를 따릅니다!
히틀러는 독일은 유대인, 공산주의자, 퇴폐적 이기주의자들의 극악무도한 반역으로 인해 무너졌다고 선전했습니다.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영국, 프랑스 등의 협상국이 독일을 수탈해간다고 하여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몸부림 치던 독일인들은 히틀러에 동조하게 되었습니다.
히틀러는 1923년 뮌헨 폭동의 실패, 대통령 선거 패배 등 여러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결국 1933년 1월 30일 수상이 되며 집권에 성공합니다.
히틀러는 독일이 처한 일련의 불행은 공산당이나 유대인들의 음모를 통해 나오므로 이를 격멸해야한다는 논거로 모든 권력을 수상에게 실어주는 수권법을 밀어 붙입니다. 수상에게 권력을 몰아준다는 법률은 독재를 공식화 한다는 것인데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 만의 의석 수로는 부족했습니다.
1929년엔 뉴욕 증권 시장에서의 기록적인 주가 폭락으로 시작되 대공황이 전세계를 강타하고,
1933년에는 공산주의자의 방화로 독일의 국회의사당이 불에 탔습니다.
눈앞에 들이닥친 위기에, 나치당의 반대하던 몇몇 당들이 히틀러에게 정국 안정을 위해 권력을 실어줘야 한다고 판단하고선 수권법에 찬성을 하게 됩니다.
결국 수권법은 가결되었고 히틀러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얻게 됩니다.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나치당이라고 불리우는 히틀러의 당은 독일어로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라고 불립니다.
여기서 표시된 NAZI 가 약칭이자 멸칭이 되어서 나치당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수권법의 통과와 함께 히틀러는 나치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해산시키고 독일의 유일한 합법 정당으로 나치당만을 인정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히틀러의 이상대로 독일을 개조했습니다.
히틀러는 앞서 이야기 했듯이 유대인, 공산주의자, 퇴폐적 이기주의자를 적으로 규정하고 선전했기 때문에 그들을 공공연하게 박해했습니다. 1942년부터 실행된 유대인 대학살은 유명하지요.
여기에는 미술도 휘말리고 맙니다.
히틀러는 모두가 독일의 힘을 믿고 따르면 강력하게 부활할 것이라고 선전했는데 사람들이 믿어야 하는 독일의 이미지란, 단정하고 순수한 이상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따라서, 미술적으로 신고전주의 양식을 숭상했습니다. 이와 같이 권위주의 국가에서 내세우는 전통 지향적, 아카데미적 복고풍 미술을 권위주의 미술로 칭합니다만, 유의미한 미술사조로써 자주 쓰이는 표현은 아닙니다. 독재자의 취향에 따라 그 내용은 신고전주의가 아니더라도 계속 바뀌기도 하여 그 실체가 없기 때문이지요.
<빛의 성당> 은 히틀러의 개인적인 친구이자 이후 장관에 임명하게 되는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가 설계한 쇼입니다. 나치당 전당대회를 열 때, 탁 트인 광장에서 일렬로 서치라이트를 하늘로 비추어 기둥들을 만든 것입니다. 밤에 하늘 높이 솟은 빛의 기둥들이 만드는 분위기는 모두를 열광시키고 히틀러를 우상화 하는 데에 큰 공헌을 합니다.
1934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임기 중 사망하자 히틀러는 본인의 총리 직위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의 직위를 동시에 이행하여 총통이 됩니다. 총통으로 등극하자 히틀러는 총리 관저를 확장 공사하여 웅장한 궁전을 짓습니다.
현재에도 쓰이고 있는 경기장입니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그 외에도 각종 건축물들을 설계하고 건설했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모두 정형미를 갖춘 신고전주의 양식에 따르는 로마풍 건물입니다.
신고전주의 양식에 맞춘 각종 조각이나 미술을 통해 베를린을 개조하고자 하기도 했지요.
히틀러는 신고전주의 양식에 따라 베를린을 통째로 뜯어 고쳐, 게르마니아 라는 새로운 도시로 바꾸길 원했습니다.
이후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의 폐기를 선언하고 세계 최대의 고속도로, 아우토반과 같은 대형 건축 사업들을 펼치고 군대를 다시 확장하는, 독일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정책에 몰두합니다.
사람들은 열광했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진 독일은 활력을 되찾았습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독일의 부활과 경제 기적은 히틀러가 노리던 효과는 아니었습니다.
군대를 일으켜 국가적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한 노력이 언제나 우선이었습니다. 물론, 군인들을 위해 음식, 생필품, 물자를 생산해야 했고 보급품의 운송을 위해 도로와 철도를 정비했기 때문에 경제성장 역시 부차적으로 따라왔지요.
히틀러는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서 빼앗긴 것을 되찾는다는 것을 명분으로 점점 군사적인 확장을 준비했고, 오스트리아, 체코 등을 차례로 정복하고 총구를 폴란드로 돌립니다.
패전의 잿더미 속에 파뭍힌 독수리는 깨어나 먼지를 털고 일어서 해가 뜨는 곳 저 너머로 비상했습니다. 옛 질서의 잔재들을 불살라버리며 비상하는 독수리는 이카루스가 도전하지 못한 곳 저 너머까지 나아갔습니다.
2차 세계대전을 향해 독일은 행진하고 있었고, 그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파멸이었습니다.
나치 정권은 신고전주의를 숭상하던 반면, 다다이즘 이후에 등장한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표현주의... 등을 퇴폐적이고 반 체제적이라고 해서 모두 탄압합니다.
그렇게 이상적이지 않고, 질서적이지 않는 작품들을 압수해간 뒤, 작가들을 모욕주기 위해서 퇴폐미술전을 개최하여 공개망신을 줍니다.
독일에서는 표현주의가 유행했었고, 히틀러 집권 이전까지 추상과 인간의 무의식의 세계로 나아가던 다양한 미술이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그러한 모든 미술을 쓰레기로 칭하며 퇴폐미술로 낙인을 찍고 탄압하였지요.
수많은 작품들이 퇴폐미술전에 걸려버리고 많은 작가들은 탄압을 피해 이민을 가거나, 자살했습니다.
그 중, 독일의 표현주의 작가.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는 히틀러의 탄압과 오스트리아 합병 등의 사건을 지켜보다가 공포에 휩싸여 자살하고 맙니다.
파시즘은 가장 이해하기 힘든 정치 이념일 것입니다.
무솔리니가 주창한 파시즘이 그 시초이긴 합니다만, 무솔리니는 본래 공산주의자였습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주의와 결별하고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주 이념으로 삼아 파시즘을 창설한 것이지요.
민족주의, 국수주의, 국민단결, 권력의 집중, 지도자 원리 등이 그 특징으로 나타납니다만, 그것이 파시즘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독재는 파시즘이 아니더라도 등장할 수 있으며 민족주의는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민족집단이면 언제든 등장할 수 있거든요.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파시즘은 현대적 관점의 좌파 우파를 가리지 않습니다.
분배냐 성장이냐, 노동자냐 기업이냐, 전통이냐 혁신이냐 등은 파시즘에게 있어서는 관심사가 아닙니다. 민족주의나 자국 우선주의는 그런 현대적 좌우의 개념 안에서도 등장할 수 있는 비교적 명료한 사상이기 때문이죠.
어떤 이들은 파시스트로 불리우지만 그 정책은 사회주의적이라, 분배와 노동자 우선을 외치기도 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정 반대로 전통주의적이고 종교적 윤리를 내세우며 파시스트라고 불리기도 하지요.
파시즘에게 있어서 대부분의 사회적인 화두는 그저 수단일 뿐, 국민 통합과 지도자 밑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능동적 국가조직 그리고 자국 우선주의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기 바쁩니다.
결속된 국가, 단결된 국가를 위한다는 파시즘의 모토는 파스케스라는 물건이 잘 상징합니다.
파스케스는 고대 로마제국의 집정관이 사용하던 권위의 상징 같은 물건으로, 한자루의 도끼에 여러 막대들이 묶여있습니다.
결속을 통한 힘을 의미하지요.
파시즘은 국민 통합주의와 강력한 지도자 밑에서 일치 단결하는 지도자 원리에 기반을 두었을 뿐 체계적인 사상 정리가 된 이념은 아닙니다.
파시즘의 모순들을 나열해볼까요?
파시스트들은 전통주의를 지향하면서도 신기술에 열광합니다.
호전적이고 남성적 문화를 지향하면서도 어머니들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는 등 여성에 대한 배려를 하기도 합니다.
급진적이고 과격하지만 그 누구보다 보수적입니다.
국민을 최고 가치로 내세우지만, 대중사회를 경멸합니다.
폭력과 질서가 혼재되어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나치즘은 더더욱 혼란스럽습니다.
히틀러 개인이 믿은 유대인 음모론과 인종주의, 그리고 아리아인 신화가 앞서 언급된 파시즘의 기본 강령 속에 포함되어있었습니다.
이미 수천년간 사람들이 살면서 이미 민족간에 서로 섞이는 일이 많았는데 어떻게 인종주의가 유효할까요? 그렇기 때문에 나치는 스스로 여러번의 수정과 예외 사항들을 만들어가며 본인들의 모순을 고치기 바빴습니다. 과학적으로는 순수한 독일인, 아리아인 신화는 거짓임이 명백하지만, 나치즘은 인종주의를 고수하지요.
파시즘은 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몰락했지만 전편의 스페인 내전에서 보여주던 것과 같이, 산업화 이후에 대두된 수많은 사상과 생활문화들의 변화가 쌓이고 쌓여 모순을 일으키고 사람들에게 부조화를 심어준 결과 1930년대에 별똥별과 같이 갑작스럽게 나타났습니다.
독일인, 이탈리아인이 특별히 악당이어서 파시즘에 물든 것은 결코 아닙니다.
파시즘은 전통과 혁신 사이에서 몸과 마음을 기댈 정신적 지주를 잃어버려 불행해진 인간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파시즘은 국가와 민족이라는 정신적 지주를 내세우고 대안을 제시해 주었기 때문에 지지를 받은 것입니다.
인간은 어디선가 기대고 싶은 심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개인이 기댈 곳은 반드시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