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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현 Apr 06. 2024

야수파와 표현주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점, 선, 면

표현주의

는 20세기 초부터 1930년대 까지 유행한 미술사조 입니다.


그 특징은, 주관의 세계를 표현하고 감성과 발상을 위해 세상의 법칙을 의도적으로 왜곡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들은 여타 모더니즘 양식들과 마찬가지로 미술을 자연의 재현이 아닌 감정의 표현에 두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이 표현주의라는 이름을 얻고 독자적인 미술사조가 된 데에는 인간의 감성의 세계를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여태까지의 미술사조들과는 다른 방식을 표방했기 때문입니다.


표현주의는 후술할 야수파와는 달리 색체를 강렬하게 사용하는 것에 특별히 집중한 것도 아니고 입체주의처럼 입체에 대한 재해석으로 형태에 대한 파괴에 집중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야수파와 입체주의에서 나타난 자유분방한 색의 활용과 형태의 파괴는 표현주의에게 있어서는 표현의 수단일 뿐, 그 내용은 감성의 전달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상주의도 감성의 전달을 표방했는데, 무엇이 다른 것이었을까요?


클로드 모네 <인상 해돋이>

인상주의는 빛과 색, 그리고 일상의 표현-재현에 중점을 두지요. 늘 보던 일상이 때로는 감성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에 집중했다고 할까요? 인상주의는 표현의 방향이 관객에서 그림으로 향하도록 합니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작

반면 표현주의는 그 대상이 (일상이라던지)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구도나 구성 등의 균형 등, 회화적 요소들은 왜곡되었지요. 색이나 구도 등은 모두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상주의와 달리 일상적과는 거리가 먼 개체가 그려지며 거의 작가의 주관을 드러내는 데에 모든 역량을 싣습니다. 표현주의는 표현의 방향이 그림에서 관객으로 향하게 합니다.



야수파

는 프랑스의 앙리 마티스를 중심으로 생긴 한 그룹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앙리 마티스 <이카루스> 1946년

색종이 콜라주로 만들어진 해당 작품은 하늘을 비행하고자 한 이카루스의 이야기를 나타내는 작품입니다. 붉은 점으로 표현된 심장은 하늘을 동경하는 인간의 의지를 나타내고 검은색으로 표현된 날개를 펼치는 듯한 인물은 이카루스 입니다.


느낌이 오셨을까요?


야수파는 앙리 마티스를 중심으로 강렬한 색으로 "야수와 같은 정제되지 않은 작품을 내놓았다." 라고 해서 야수파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19세기 말에 모더니즘 양식이 발생하여 다다이즘, 입체주의 등등의 여러 사조와 함께 정형미의 전통적 회화에 도전하는 시도들 중 하나였지요.


앙리 마티스 <모자를 쓴 여인> 1905년
나는 여성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렸을 뿐이다. - 앙리 마티스


작가가 색의 사용을 결정한다는 이야기는 당시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지요. 위와 같은 앙리 마티스의 소감은 그림을 만드는 데에 있어서는 작가의 선택이 가장 중요하다는 메시지였지요.



표현주의와 야수파는 어느 정도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어보입니다. 확실히 작가의 선택에 있어서 유연한 사고를 보여주며 자연스러움 이라는 관점에서의 구도와 채색을 왜곡한다는 점은 둘다 비슷하거든요.


그럼에도 굳이 구분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역시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무엇에 집중을 하였는지는 각자가 어느 정도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특히 이런 중점에 둔 가치의 문제 말고도 활동한 작가들의 국적이나 파벌의 소속감 여부 등에서 상이하기 때문에 구분을 하는 것이지요.


앙리 마티스 1869 ~ 1954

앙리 마티스가 중심이 된 야수파는 프랑스에서 마티스의 파격적인 미술 작품들의 공개와 함께 뜻을 같이하는 그림 모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야수파는 지향점도 지향점이지만, 프랑스의 작은 미술가 그룹이라는 점에서 파벌로서 구분되고 정의내려집니다.


그렇기에 독일에서 발생한 표현주의와 그 시작과 지향점, 역사가 구분되어 다른 미술사조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다시 표현주의 쪽으로 넘어가 볼까요?


표현주의가 유행하던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에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국가적 자존심의 상실 등으로 어두운 분위기였습니다.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1880 ~ 1938

표현주의, 그 중에서도 다리파의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전쟁의 참상을 보고선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전역합니다.


키르히너는 1차 세계대전의 경험 이후로 전쟁을 혐오하고 밝은 미래를 약속했던 문명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기 됩니다.


키르히너는 나치즘이 대두하기 시작하자 전쟁이 다시 일어날 것을 예감하고 나치에 반대하였지요.


결국 1933년 히틀러는 독일의 수상이 되었고 정권의 독재화를 차례로 진행합니다.


결국 키르히너와 표현주의는 고전 미술 양식을 선호하던 나치 정권에 의해 퇴폐미술로 지정되어 거래 금지 및 압수와 파괴를 당하게 됩니다.


키르히너가 그린 전쟁의 경험을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키르히너는 군인의 초상 이외에도 삭막한 거리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형태를 파괴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 것도, 색 자체를 드러내기 위해 그린 것도 아니기에 표현주의는 각자가 느끼는 세상을 그려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이말은 점, 선, 면은 그저 수단일 뿐 중요한 것은 감정의 표현이지요. 표현주의의 기본적인 정신은 바로 이것입니다.


사실, 그런 점 때문에 표현주의의 시작을 빈센트 반 고흐로 잡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흐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후기 인상주의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관점에 따라서 표현주의의 시초로 잡기도 하지요.


고흐는 자유분방하고 본인만의 특색이 워낙 강하기 때문이지요.


표현주의는 그 기원이 고흐냐, 1차 세계대전 전후의 독일이냐로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그 끝은 나치의 집권과 퇴폐 미술전의 개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키르히너는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소식을 듣고선 전쟁을 직감하고 자살하고 말지요.


나치는 잠시나마 온 유럽을 정복하고 문화 전반에 큰 피해를 입히고 말았지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개인에 대한 탐구가 나타난 것이 퇴폐적이라고 나치는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개인을 억압하고 미래를 거짓으로 약속한 나치가 불러온 결말은 비참했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표현주의가 나타내고자 한 정신이 퇴폐적이라거나 위선적이라는 비판은 옳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활기차 보이는 거리도 작가가 보기에 사람들 한명 한명의 정신이 죽어있다고 보인다면 키르히너와 같이 우울한 거리의 모습을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이며 작가가 나타내고자 하는 정신이 자유롭게 화폭에 그려진다면 그것 자체로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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