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 목요반달무대
무엇이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즐겁게 하는가를 생각해 보곤 합니다. 선생님들의 친절함, 급우들 사이의 화목함, 편의 시설 등이 흔히 생각해 볼 만한 것들이 아닐까 합니다. 학교장은 이런 요소들을 뛰어넘어 학교 전체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좀 더 큰 스케일의 이벤트를 도입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런 생각과 함께 목요학술포럼(1화 참조)을 실시하면서, 지적 활동과 함께 재미라는 측면에서의 대응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이 다양한 욕구를 갖는 학생을 위한 균형 있는 학교운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자면, 학업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이 좋아할 프로그램과 학업에 관심이 적은 학생들이 좋아할 프로그램을 병치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는 학교의 건강성과 관련한 것이며, 일종의 형평성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이유로 도입된 프로그램이 ′목요반달무대′입니다.
목요반달무대는 격주 목요일 점심시간에 교정의 반달무대에서 춤과 노래 등의 공연을 즐기는 프로그램입니다. 물론 공연하는 사람이나 관람하는 사람 모두 본교 학생이지요. 공연 희망자는 담당부서에 공연 신청을 하면, 담당부서에서는 점심시간을 고려하여 공연팀 수를 조정하고, 실제 운영 및 지원은 학생회에서 담당합니다.
공연하는 학생들은 보통 2주 정도 연습을 한다 하더군요. 공연 특성상 댄스팀이 가장 인기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제 나이에 그런 공연이 뭐가 재미가 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책임감으로 꼬박꼬박 관람하며 박수도 많이 쳐주었습니다. 어느 봄날에 햇볕을 받으며 공연하는 학생과 환호하며 즐기는 학생들을 보니, 참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이런 학교 문화를 만들어 간다는 것에 대하여 뿌듯함도 있구요. 아마 학생들 마음도 그랬을 겁니다!
춤과 노래만이 아닌 다양한 장르가 공연되었으면 바람으로 학생회와 담당부서에 압력도 넣어봤지만, 다른 장르 공연은 드물더군요. 클래식 연주도 있었으면 했는데, 알아보니 할 수 있는 학생이 적었습니다. 두 번째 학교는 중심 지역 학교이고, 여기서도 목요반달무대와 비슷한 이벤트를 실시했는데 클래식 연주도 많이 이루어지더군요. 우리 사회의 차이에 대하여 생각해 보곤 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목요학술포럼은 활성화되었는데, 목요반달무대는 위축되어 갔습니다. 담당부장님과 얘기해 보니, 가장 인기 있는 댄스팀이 공연 준비를 힘들어 한다 하더군요. 생각해보니 학교분위기를 위해 댄스팀 학생들을 이용해 먹기만 하나 싶어, 댄스팀 학생들을 교장실로 불러 차와 과자를 대접하며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안무를 짜고 연습을 하는데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어 학교에서 기대하는 횟수만큼 공연하기가 힘들다 하더군요. 이래서 어느 조직이나 리더는 귀를 열어두고 사람들과 대화를 해야 합니다. 이런 대화가 없었으면, 댄스팀 학생들이 위세를 부리는 것이라는 오해를 할 뻔했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인상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학교에서 자신들의 끼를 표현할 기회를 주어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더군요. 새 교장이 오고 나서 학업 쪽으로만 드라이브를 거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는데, 목요반달무대 등의 프로그램도 있어 본인들은 물론 많은 학생들이 좋아한다고 하더군요(이런 사회적 발언을 하는 걸 보니 크게 될 학생 같더군요.ㅎㅎㅎ...). 둘은 자신의 향후 진로에 대하여 성숙도가 덜하다는 인상이었습니다. 댄스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직업적인 활동으로 이어가려는 것은 아니라 하더군요. 그러면 공부도 해보지 않으련? 하고 묻고 싶었지만, 모양이 빠지는 대화 같아서 자신의 진로에 대하여도 생각해 보라는 정도로 말했습니다. 오늘쪽은 목요반달무대에서 공연한 학생의 생기부에 기재 내용입니다.
이왕 얘기가 나온 김에 제 자랑질도 하나 하겠습니다. 임기 첫해에 학교 시설물을 살펴보다 보니, 교정에 스탠드와 반달모양의 무대가 있는데 무대가 너무 좁더군요. 과연 저 무대에서 실제 공연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공연 역사를 알아보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다음 해에 저 무대에서 학생 공연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행정실장에게 겨울방학 기간 동안 상당한 넓이를 갖는 사각무대를 만들도록 했습니다. 아무래도 댄스도 있을 것 같아 딱딱한 콘크리트가 아닌 에폭시로 시공을 하도록 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처럼, 애정과 책임감만큼 학교시설의 개선 방향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교육에서의 차별성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교육은, 특히 학교에서의 교육은, 그 대상자인 개별 학생의 입장에서는 피할 수 없는 차별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학생이 원하고 가장 필요한 부분에 교사와 학교가 교육의 중점을 둔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겠지요. 더군다나 학생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에 대한 것은 학생 본인도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을 수 있으니 더더욱 어려운 일이지요. 부모와 자식의 만남, 태어난 국가 등 삶의 곳곳에는 결코 정당화되기 어려운 차별성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학교장을 하면서 이런 차별성을 상당히 의식했습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학교를 리딩해 나가는 것이 어떤 학생에게는 자신에게 필요한 부문을 패싱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학교는 이러이러한 교육을 해야한다 하는 상세한 규정과 매뉴얼이 있는 것도 아니지요. 그러니 어찌해야 할까요? 기본적으로는 삶이 그런 것처럼, 학교교육도 일정 부분 차별성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입니다. 그런 바탕 위에서, 첫째 학교에 대한 정보 공개를 확대하고 학생의 학교선택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 학교구성원(학생, 교사, 학부모)의 학교교육 방향에 대한 대화를 확대해야 합니다. 셋째 교사와 학교가 너른 품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에 대해 좀 더 설명하고 싶네요. 내 신념이 확고하다 하여 좁은 폭의 교육관을 추구한다면, 그 폭 안에 있는 학생에게는 축복일지 모르지만, 그 폭 바깥에 있는 학생에게는 지옥과 같을지도 모르잖아요. 학교운영도 이런 위험성에서 벗어날 수 없겠지요.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신임교장 연수에서 몇 년간 강사로 활동했는데, 이런 강의에서는 당연히 제 자랑질을 하지요. 남 앞에 서는 재미 중 하나가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어느 강의에서 신나게 제 자랑질을 하던
중 쉬는 시간에 어느 분이 다가와서는 수줍은 듯이 말하더군요. 자신은 그저 학생들 이름을 친절하게 불러주고 위로해 주는 역할 정도를 교장 역할이라 생각했는데, 제 강의를 들어보니 자신이 너무 소극적인 역할을 하는 것 같다고요. 머리가 띵 했습니다! 학교 상황에 따라 학교장의 역할이 다른 것인데, 제 생각에 취해 잘난 체만 하는구나 라는 느낌이 들어서요.
어느 날인가 학부모와 얘기하던 중 확인사살을 당했습니다. 자녀가 중학교 다닐 때, 교장선생님이 등교맞이를 하면서 표정이 어두운 학생을 볼 때마다 이름을 불러주며 위로와 격려를 해 주셨는데, 자녀가 거기에 큰 힘을 얻어 중학교 과정을 잘 마쳤다고 하더군요. 사실 전 학생 이름을 10명 정도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격려보다는 엉덩이를 걷어차 분투케 하고, 무언가 도전할 가치를 강조했지요. 혹시 저한테 따뜻한 위로를 기대한 학생이 있었다면, 그 학생에게 저는 그저 매몰차고 허황된 얘기나 하는 그런 교장일 뿐이겠지요. 아이쿠...머리야!
교사와 학교는 균형 잡힌 철학과 너른 품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성격의 교사와 학교 풍토도 필요하고요. 지나치게 독선적인 교사의 태도는 학생들을 질식시킬 수 있겠지요(제 얘긴가!). 우리 사회가 갖는 보편적 가치를 바탕으로, 학생 학부모의 일반적 요구를 수용하는 학교를 운영해야 함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다만, 그런 메인스트림에서 벗어난 가치와 태도를 가진 사람에게도 관용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떤 학교풍토냐에 따라 어떤 담임이냐에 따라 각 개인에게 떨어지는 행불운은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는 것이고, 이는 사회를 이루는 인간이 치러야 하는 대가가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