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 교직원 지원
가끔은 외부인들이 학교에서 학교장과 교직원의 관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인간은 어떤 판단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경험하지 않은 판단은 유사한 경험으로부터 유추하고, 그것도 곤란하다면 자신의 경험의 프리즘에서의 위계를 추측하여 판단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고교까지의 학창 시절 경험에서 선생님들은 다소 어렵고 무서운 존재이니 선생님보다 높은(?) 사람이라 생각했던 학교장은 어마무시한 권력과 권위를 가진 존재로 생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실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실제와 사회적 인식의 불일치는 장학사에 대한 것도 있습니다. 나이가 있는 분들은 장학사를 ‘학교 대청소를 하게 하던 높은 분’ 정도로 생각할 것 같은데, 이 또한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약간만 과장하여 말하면, 학교장은 학교구성원의 시다바리이고 장학사는 학교의 시다바리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개인적 얘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저는 장학사 시험을 삼수 끝에 겨우 합격했습니다. 동작대교 위를 지나다 합격 소식을 들었는데, 바로 차를 현충원으로 틀어 현충탑 앞에서 ‘교육 발전과 교사를 보호하는 데 뼈를 묻겠다’라는 맹세를 했습니다. 웬 뼈냐고요? 제가 약간 격한 성정이라 그렇습니다. ‘뼈’ 하니 웃픈 추억이 떠오르네요. 공모교장도 재수 끝에 결정됐는데, 첫 번째 도전의 대면심사가 끝나갈 무렵 시간이 남았는지 뭐 하고 싶은 얘기를 해보라 하더군요. 그때도 ‘뼈를 갈아서라도 학교다운 학교를 만들겠다’라고 말했습니다. 발언 후 평가단을 살펴보니 다들 이미 부여한 점수를 수정하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합격한 줄 알았는데… 떨어졌습니다! 아마도 ‘뭐… 저런 미친 ×이 있나!’ 하고 점수를 깎아버린 것 같습니다. ㅠㅠㅠ… 진심이었는데…. 사람들이 진심을 몰라줘요! 뼈를 갈지 않고 은퇴한 지금이 훨씬 좋습니다. 뼈도 멀쩡하고! 암튼, 이렇게 힘들게 학교장이 되었으니 교직원들을 많이 도와야겠지요. 학교장의 「교직원 지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무조건 교직원들을 최고로 대우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고로 대우하면 그분들도 최고의 교육을 펼치리라는 계산된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저와 인연이 닿아 함께 일하는 분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정언적 가치관 때문입니다. 실천 증거를 제시해 보라고요? 교직원께 화를 낸 기억이 몇 번밖에 없습니다.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갑갑한 상황도 여러 번 있었지만, 제가 많이 참고 친절하게 대했습니다. 요즘은 사람들의 갈등이 차돌이 부딪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더군요. 어느 한쪽이 약간의 스펀지 역할을 해주면 티키타카 하면서 갈등이 잦아들 수도 있을 텐데, 마치 용수철처럼 상대에게 받은 모욕과 스트레스를 증폭시켜 보내는 경우가 많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가 스펀지 역할을 했습니다! 마음만으로는 증명이 안 될 것 같으니, 노고가 들어간 증거를 제시하지요. 학교에서는 연 4회 정기고사를 보는데, 정기고사 첫날은 오후에 교직원연수를 하겠다고 선포를 했습니다. 전에 없던 행사이니 반대가 있고, 반대 이유로 중식이 없다는 것을 제시하더군요. 제가 출근하며 강남 유명 제과점에 들려 학교카드로 샌드위치를 사서 제공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 샌드위치를 쉽게 먹을 수 없습니다. 비싸서요. 연말에는 전교직원을 모시고 동해안으로 1박 2일 연수를 갔는데, 숙소든 음식이든 체험활동이든 최고로 준비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동해안 여행을 자주 가지만, 제 돈으로 그런 숙소에서 숙박한 적 또한 거의 없습니다.
오른쪽 사진은 속초에 있는 유명한 리조트입니다. 이 숙소도 연수 장소로 알아봤는데, 단체할인이 없어 용역 업체에서 이곳을 숙소로 섭외하지 못하더군요. 교직원들을 꼭 한번은 모시고 가고 싶었는데…. 이곳에서 연수를 하면 이런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선생님! 이 리조트가 위치한 땅은 곶이라는 지형으로 예전에는 아무 쓸모가 없었을 겁니다. 바람만 많고 돌투성이 황무지였겠지요. 현재는 3면이 오션뷰를 가진 최고의 리조트 부지입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학생들도 이럴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은 그저 선생님 속을 썩이는 문제아지만, 우리가 예측하기 힘든 미래 어느 날에는 그 학생이 사회에 꼭 필요한 인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라고. 준비는 해두었지만 써먹지 못한 스토리텔링이 또 있습니다. 독자께서는 잔디를 깎고 난 후에 풀에서 나는 향기를 맡아본 적 있나요? 학교가 큰 위기를 겪고 나서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할 때, 이런 훈화를 해야겠다는 구상을 했습니다. 물론 훈화하는 날 아침에는 학교의 잔디를 모두 깎도록 사전 조치하여야겠지요. ‘여러분! 오늘 아침에 등교하며 잔디를 깎고 난 후의 향기를 맡아보셨나요? 향기는 잔디의 상처에서 나는 것이겠지요. 저는 이 향기가 상처를 극복하고 생명을 이어가려는 잔디의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런 의지가 없다면 그저 썩는 냄새가 날 뿐이겠지요. 고통은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만날 때 향기가 나지만, 고통에 굴복하면 악취가 날 뿐입니다.’ 일상의 많은 순간에 학교장으로서 해야 하는 교육적 역할을 생각하곤 했습니다. 저는 거의 학교장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지 않나요? ㅎㅎㅎ…
선생님들과 생각하는 바가 다르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가족이든 친구든 다 비슷한 상황이 있겠지요. 가치관이 다른 것이라면, 뭐 그러려니 하겠지만 객관적인 판단으로 보이도 틀린 판단을 고집하는 분들도 있더군요. 이럴 때 제 어머니는 ‘에이, 시국지 같은 놈!’이라고 핀잔을 주셨지만, 요즘 그런 소리를 직접 했다가는 큰일 납니다. 그럼 어떻게 하냐고요? 데이터를 만들어 전체 선생님과 공유합니다(시국지 분에게만 드리면 좋겠지만, 그러면 그 시국지 님이 눈치를 채요!). 그래도 틀린 판단을 안 바꾸면 어찌하냐고요? 그런 상황에서는 비교형량이란 단어를 생각합니다. 시국지 선생님의 생각을 바꾸게 강압을 가했을 때, 그분이 입게 될 굴욕감과 학교가 얻는 교육적 성과 중 어느 것이 더 클까를 비교합니다. 저는 전자의 무게를 많이 느꼈습니다. 아래는 자기주도학습도전단 활동이 갖는 교육적 성과를, 활동에 협조적이지 않은 시국지 선생님들이 깨달았으면 하여 공유한 자료입니다.
학교장마다 학교운영 스타일에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수학과 출신이라 그런지 학교 전체의 데이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를 통해 전체적인 학교 수준과 변화를 체크하곤 했습니다. 물론 (상당한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손바닥을 펴서 느껴지는 교내 공기의 흐름에서 느껴지는 학교분위기도 중요합니다. 학교에 오는 각종 자료를 제 나름대로 가공 처리하여 선생님들께 제공하곤 했습니다. 그런 자료들을 보며, 선생님들 각자의 교육활동을 점검해 보고 부족한 부분을 파악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요. 예를 들면 디비피아 접속률의 변화 추이, 신입생 출신 중학교의 변화 추이, 전국연합학력평가별 초우수학생 명단 및 성적변화 추이 등입니다. 아래의 첫 번째 자료는 전국연합학력평가 결과 분석 자료입니다. 본교의 평균적인 성적 수준과 우수 학생 비율 및 교과목별 본교 학생의 강점과 약점 등을 파악해 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두 번째 자료는 본교 논술고사 결과 데이터입니다(제발이지 이 데이터를 보고, 합격가능성이 있는 학생들만 수리논술에 지원했으면 했지만, 시극지 학생들이 말을 듣지 않더군요.).
학교교육활동을 하다 보면 학교 전체의 의견을 조율할 필요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는 각 선생님이 담당 영역인 교과교육활동이나 담임활동에 자율적 판단을 존중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자율과 권한이 없는 조직은 살아있는 조직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선생님의 판단에 따라 학교 전체의 의사결정이 뒤틀리는 상황이 염려되기도 하지요. 이런 경우에 학교장이 어떤 방식으로 학교를 리드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학교운영의 혼선을 방지한다는 측면만이 아니라, 선생님들의 사기와 학교의 분위기 측면에서도요. 본교에서는 일과 중에는 휴대폰을 제출하도록 학생들을 설득하고, 실제로 ‘일과 중 휴대폰 제출하기’ 운동을 실시했습니다. 학부모와 선생님들은 적극 찬성하지만, 학생 중에는 학생인권 등을 언급하며 반대하는 경우도 있더군요. 이런 상황에서 학교가 휴대폰 제출 비동의 학생에게 휴대폰 소지를 허용한다 하고는, 다른 방향에서 해당 학생을 불편하게 하면, 이는 학교의 품격에도 어긋나고 학생에게 사회제도와 학교의 지도에 대한 불신을 키워주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해당 학생을 교장실로 불러 면담과 당부를 하고 휴대폰 소지 허락서를 코팅하여 주고, 선생님들께는 아래와 같은 당부의 메시를 보냈습니다. 우리 세대가 어떻게 성장했든, 자라나는 세대는 당당하게 성장하게 해야 한다는 당위에 의한 결정으로 이해했으면 했습니다.
학교장을 하면서 다른 학교장과의 관계에서 다소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유의 상당 부분은 제가 갖는 개인적인 부족함 때문이지요. 저는 소통에 서투르고, 다소 독선적이고 기타 등등… 뭐… 자아비판 시간은 아니니 제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고자 합니다. 학교 및 학교장의 역할에 대한 인식의 차이도 불편함의 이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학교는 국가사회의 교육 관련 명령을 수행하며, 시민의(구체적으로는 학부모의) 위탁된 교육적 요구를 수행하는 기관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말이 다른 학교장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저는 그 명령과 위임을 반드시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만약 그것을 못해낸다면 부끄러워해야 해야지, 다른 변명을 내세운다면 이는 그저 핑계가 아닐까 합니다. 사람들 사이의 만남은 비록 얘기를 하지 않아도 피부로도 상대방의 생각을 느낄 수 있지 않는가 싶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이질감을, 때론 이물감을, 느끼는 것이 아주 힘들더군요.
학교장과 교직원(교사를 포함한 개념으로, 학교에는 교사가 아닌 직원들도 상당히 많고 그분들의 역할도 매우 중요합니다.)의 관계는 맡은 역할의 차이일 뿐이지 신분상 차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20대에 교사를 시작하면서부터 가졌고 지금도 같은 생각입니다. 학교에서는 보통의 경우 행정실을 통해서 교장실을 출입하도록 합니다. 물론 모든 관행에는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지요. 악성 민원인의 교장실 출입을 방지하거나 너무 쉽게 교장을 만나는 분위기를 줄이기 위한 안배이겠지요. 저는 학교장을 하면서 복도에서 직접 교장실로 들어오도록 했습니다. 제가 젊은 교사일 때, 행정실을 통해 교장실로 들어가려면 행정실 누군가에게는 교장실 방문 목적을 얘기하게 되는데, 그것이 상당히 불편하더군요. 가끔은 제가 젊은 시절에 교장‧교감에게 했던 비난이 먼 우주를 돌고 돌아 제 귀에 돌아와 꽂히곤 합니다. 아마… 그래서 타인에 대한 비난을 삼가야 하나 봅니다! 가끔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때로는 학교의 어려운 상황을 직접 뛰어들어 해결하곤 했습니다. 주위에서 걱정을 하더군요. 학교장은 학교의 최후의 해결사가 되어야 하는데, 너무 가볍게 갈등 상황에 뛰어드는 것 아니냐고요? 글쎄요… 제 경험의 세계에서는 지지부진한 해결 과정과 갈등으로 인한 여러 사람의 고통보다는 학교장이 한큐에 해결하는 것이 낫더군요. 학교장이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는 어떡하냐고요? 뭘...어찌합니까? 그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법적 다툼으로 해결해야지요. 하긴 그런 극단적인 상황 없이 은퇴를 하니 이렇게 큰 소리를 빵빵 칩니다. 뭐… 은퇴자의 특권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