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 학교발전과 학교장
은퇴하고 난 후의 삶이 좋습니다. 느긋하게 일어나 따릉이를 타고 야외 카페에서 커피와 빵으로 점심을 하는 일상에 만족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없고, 스스로 또는 직책으로부터 부여된 미션에서 벗어나 얻는 편안함이란 생각입니다. 이번 편을 재개하는 데 8개월 이상이 걸렸습니다. 학교발전에 있어서의 학교장의 역할에 대해 쓰겠다는 것은 애초 목록에 있었지만, 이 주제로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습니다.
퇴직 후에 학교를 살펴볼 두 가지 종류의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는 일주일자리 시간강사를 몇 번 해보았습니다. 15년 이상 수업을 안 하다 진행하는 수학수업이지만 다행히 기억이 많이 남이 있어 수업을 하기에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다른 이야기지만, 머리가 나쁜 사람은 지식을 습득하는 것도 느리지만 망각도 늦게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저는 즐겁게 수업을 했습니다. 뭐… 학생들은 그리 즐거워하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요. 또한 근무하는 일주일 동안 근무교의 여러 교육활동과 학교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었던 게 흥미로웠습니다.
다른 경험은 교육청 의뢰로 학교장 평가를 한 것입니다. 학교는 물론이고 학교장 역할수행에 대한 평가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근본적인 어려움은 학교와 학교장 역할에 대한 객관적 평가기준을 세우는 것이 어렵다는 점입니다. 학교마다 주어진 상황이 달라 평가 대상을 서열화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인정하기 힘든 것은 있습니다. 하나는 여건에 따른 어려움을 호소하며 책무를 다하지 못함에 대한 변명을 하는 경우이고, 둘은 학교교육에 대한 무지와 빗나간 열정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독자의 제 글에 대한 비판적 관점일 수도 있다는 점을 의식하며 이제 최대한 솔직하게 학교교육에서 학교장의 역할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학교교육의 목적을 이루는 것을 학교발전이라 정의한다면, 학교발전을 이루는 주체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려고 합니다. 교육의 3 주체로 일컬어지는 학생, 교사, 학부모 외의 국가나 교육자치단체는 학교발전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교육과정을 주도하는 교육부나 예산과 학교조직을 지원하는 교육청은 교육의 틀과 방향을 정하지만, 그것이 실제 학교발전을 결정하는 주체는 아니라는 판단입니다. 다음으로 학생도 학교교육에 큰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학교교육의 대상이라는 궁극적인 한계로 인해 학교발전의 주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남은 것은 교원과 학부모뿐이네요. 여기서는 교원을 교사와 학교장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려 합니다.
학부모가 학교발전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사례로 특목고와 자사고에서의 학부모의 역할을 제시합니다. 자녀 교육에 대한 상당한 전문성과 역량을 갖춘 학부모는 학교교육의 여러 측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여 학교발전을 촉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조직이든 조직의 이해관계자들의 높은 관심과 영향력은 조직의 과업 수행을 촉진한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다만, 학부모의 학교교육에 대한 영향력과 압력에 대하여 학교는 대체로 불편함을 느낀다는 현실적 측면과 일반 학교의 학부모가 특목고나 자사고의 학부모만큼 자녀 교육에 대한 상당한 전문성과 역량을 갖추고 학교에 대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느냐는 측면에서 학부모는 학교발전의 주체가 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사가 학교발전의 주체가 되는 사례는 이상적인 혁신학교에서 볼 수 있다는 경험을 했습니다. 혁신학교에 대한 애정과 헌신성을 가진 교사군이 근무하는 혁신학교는 다른 학교에 비해 높은 교육력을 갖는 것 같습니다. 학교장 평가를 하면서 여러 혁신학교를 살펴보았는데, 몇몇 혁신학교는 정말 존경할 만한 교육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다만, 이런 일부의 헌신적인 교사들의 활동이 다른 학교로 확산될 수 있다는 기대는 교직생활을 경험한 분이라면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것을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또 다른 지적할 점은 일부 혁신학교는 학부모의 요구에 다소 둔감하고 학교교육의 방향을 교사의 교육적 신념에 따라 이끌어 가는 위험성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학교장이 학교발전의 주체가 될 수 있느냐를 살펴봐야겠지요.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판단할 때, 저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문성과 역량을 갖춘 학부모나 헌신적인 교사군이 존재하기 힘든 다수의 학교에서는 학교발전의 유일한 동력원이 학교장이라 주장합니다. 콧방귀를 뀔 분이 많겠지만 제 주장을 한번 들어보고 판단하시죠!
학교장이 학교발전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의 배경은 학교장은 교육경력에서의 꽃이기 때문입니다. 공직에서의 바람은 직위가 오르는 것과 공직에 요구되는 책무를 다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두 가지 바람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교육계에서는 단위 학교를 책임지는 위치를 얻게 된다는 것은 직위의 최고점에 도달하는 것이지요. 최고점이란 인식이 가져오는 의미 중에는 보람 있는 학교장 역할을 하겠다는 바람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학교장은 학교발전을 위해 노력하려는 의지를 가질 가능성이 큽니다. 또 다른 이유는 수업과 학생지도의 현업에서 약간의 거리에 놓인다는 점도 학교장이 학교교육 전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봅니다.
그럼 학교장이 학교발전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를 살펴봐야 할까요? 학교장의 자질과 태도, 학교의 구조와 환경적 측면에서 살펴볼까 합니다. 학교장의 자질과 태도 측면에서는 인간과 교육일반에 대한 통찰력, 사람을 대하는 스킬 그리고 조직에 대한 헌신성을 들고 싶습니다. 인간과 교육일반에 대한 통찰력은 교장이 되기 이전에 상당 부분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이런 이유로 학교장 선발 자체가 중요합니다. 물론 학교장이 된 전후의 연찬도 중요하지요. 다만, 제가 관찰하기에는 학교장이 되고 나면 배우려는 자세가 현저히 저하한다는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사람을 대하는 스킬도 학교장 역할 수행에 주요한 특성이고 이 또한 타고나는 측면이 상당하다는 생각입니다.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면서 능숙하게 일을 시키는 분들을 보곤 합니다. 저는 그런 부분에도 약합니다. 부장교사를 맡기려고 교사를 설득하다 보면, 자신이 어려운 일은 하겠지만 부서의 선생님들에게 업무를 시키는 것이 어려워 부장교사를 못하겠다는 분을 왕왕 보았는데, 그런 분들의 심정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겠더군요.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15년 정도 모시고 살았는데, 일주일에 하루 청소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재량휴업일에 집에 있게 되어 아버지가 청소 아주머니를 대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주머니가 청소하는 동안 아버지도 다른 곳에서 청소를 하시더군요. 제가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직에 대한 헌신성은 자신의 삶에 대한 윤리성을 포함한 가치관과 관련되는 태도라는 생각입니다. 생각해 보면 개인의 행동을 결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는 도덕성과 가치관이라는 생각을 나이가 들면서 더 강하게 합니다. 헌신성이 나타나는 모습이 여러 측면이 있겠지만 학교에서는 솔선수범이 아닌가 합니다. 학생은 물론 선생님들에게 정당성을 확보하는 기본적인 방법은 학교장이 솔선수범하고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며 직접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러 해 전에 판문점에서 북한 병사가 귀순하는 과정에서 대대장이 직접 귀순 유도를 하는 영상을 보고 여러 생각이 들더군요. 목숨을 걸고 하는 행동과 학교에서의 활동을 비교하는 것이 적절한 것은 아니겠지만, 부하에게 시켜 일이 잘못될 경우에 대대장이 쳐야 할 책임과 도덕적 부담감을 생각하여 대대장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직접 위험을 감수한 행동을 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학교의 구조와 환경적 측면은 학교의 기존 교육활동의 효과성과 교직원 간의 관계 그리고 학교장에 대한 우호적 분위기에 대한 것입니다. 부임한 학교의 교육활동이 어떠한가에 대한 판단은 학교장 역할의 출발점이 아닌가 합니다. 효과적인 교육활동이 이루어진다면 구태여 학교장의 색깔을 입히려 하지 않고 그저 교직원을 격려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역할수행이란 생각합니다. 기존 교육활동에 효과성이 부족하다면 그 부분을 개선해야 하는데, 이는 아주 어렵고 험난한 과정입니다. 또한 교사들 개개인은 열심히 교육활동을 하지만, 학교 차원에서 통합되어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하는 학교도 많다는 판단을 합니다.
학교구성원이 학교장에 대하여 비우호적 태도를 갖는 학교도 꽤 있는데, 이런 학교에서는 학교장의 역할수행이 매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진심으로 대하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학교장을 자주 보는데, 비우호적 분위기의 학교에서는 그런 마음가짐 말고도 어느 정도의 교활함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또한 저는 못하는 분야이지요.
학교장 중심의 학교발전을 촉진하기 위하여 교육 정책과 제도의 변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는 고교 교육활동이 대부분 수시에만 적용되는 상황입니다. 입시에 관심을 갖는 학생 대부분은 내신이 최상위권이 아니면 학교 교육활동을 무시하고 수능을 통해 정시로 입시를 돌파하려 합니다. 수시에 써먹지 못하는 내신은 무의미하게 생각되는 현실입니다. 전체 입시정원의 30% 정도는 수능 최저요건을 없애고 수시로만 선발하고, 30% 정도는 수능만으로 정시선발하고, 나머지 40% 정도는 내신과 수능을 적절히 반영하는 정시로 선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3학년까지 학교교육에 대한 일정 수준의 참여와 집중을 담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학교장에게 인사와 재정에 대한 권한을 상당히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현재는 학교장에게 소속 교직원에 대한 인사 권한이 부족하여 강제력을 동원하는 리더십을 확보하기 어렵고, 학교 예산에 대한 자율권 또한 부족하여 특색 있는 학교 교육활동을 펼치기 힘들다는 판단이 듭니다. 현실적으로 학교장에게는 많은 행정적 책임만이 부과되어 있어, 자율성과 책임감을 갖고 학교발전을 꾀하기가 곤란합니다. 최소한 제가 경험한 중등 교육에서는 언론에서 말하는 제왕적 학교장 또는 학교장의 갑질은 대부분 과장되거나 일방적 주장인 경우가 많다는 판단입니다. 오히려 무기력함과 무사안일한 학교장이 문제가 아닐는지요. 당연한 얘기지만 학교장의 교육 성과에 대하여도 객관적이고 엄중한 평가를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