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에서는 연신 3차 백신접종을 하라고 떠들어댔지만 1,2차를 맞고 고생을 했기에 3차는 맞을 생각이 아직 없었다. 거리 나무들이 톡톡톡 싹을 틔우기 시작하는데 내 몸은 점점 무기력해졌다. 지난가을부터 원인 모를 만성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내가 사는 곳은 지리산 아래 중산리 마을이다. 중산리에서 덕산마을까지 사십 리 길가에 벚나무가 줄지어 서있다. 봄에 벚꽃이 피면 희고 커다란 꽃터널이 만들어진다. 올봄에는 벚꽃터널을 꼭 걸어보리라 다짐했다. 그러던 차에 여기저기 벚꽃이 피기 시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월 첫날, 출근하는 남편 트럭에 올라타 외공마을에 내려달라고 했다. 외공마을에 내려서 둘러보니 벚나무 가지에 팝콘을 닮은 분홍빛꽃망울이 오종종 달려있었다. 가볍게 몸을 풀고 걷기 시작했다. 뼛속까지 전해 오는 짜릿한 새벽공기가 좋았다.
외공마을에서 집까지 한 시간 남짓 걸렸다. 벚꽃이 만개할 때는 더 멀리까지 가서 걸었다. 두 시간을 걷기도 했고 세 시간을 걷기도 했다. 새벽길 걷기는 한 달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다 보니 몸에서 변화가 느껴졌다. 몸이 가벼워졌고 무기력증과 만성피로도 좋아졌다.
봄꽃이 지고 나니 초록이 번져갔다. 점점 푸르러가는 지리산을 바라보다 그 안에 빠져들고 싶었다. 때마침 겨울 동안 묶여 있었던 ‘산불방지기간’이 풀려서 산에 갈 수가 있었다. ‘오월의 버킷리스트’를 적어 실천해 보기로 했다.
첫 번째 버킷리스트는 진달래꽃 보러 삼신봉 오르기다.
오월 첫날 바로 배낭을 꾸려 청학동으로 향했다. 들머리에 도착해 가벼운 준비운동으로 몸을 풀고 산으로 들어갔다. 숲 내음을 깊숙이 들이마시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빼곡한 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시리게 푸르렀다. 등산로를 따라 이어진 계곡 물소리가 동무가 되어 함께 걸어주었다. 삿갓나물, 작은 구슬붕이, 금낭화가 쉬어가라며 발걸음을 잡았다. 걸음을 멈추고 쪼그리고 앉아 꽃들에게 눈 맞춤을 해주었다.
어느새 진달래 군락지에 도착했다. 아쉽게도 진달래꽃은 다 지고 잎만 무성했다. 삼신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주능선은 언제나 가슴 설레게 했다. 진달래꽃을 보지 못했어도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지리산에 들어 있는 것으로 만족했다.
두 번째 버킷리스트는 털진달래꽃 보러 세석에 오르기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데 차 유리에 성에가 하얗게 내려앉았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세석 정상부에 피었을 털진달래가 걱정되었다. 이른 시간이라 등산객은 보이지 않았다. 바람에 부딪는 나무와 산새들 수다만 가득했다. 세석으로 가는 길을 걸을 때마다 기분이 좋다. 계절마다 습지에서 알록달록 빛깔로 꽃을 피우는 야생화와 촛대봉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풍광에 반하곤 한다. 정상 부근에 다다랐을 때 냉해 입은 꽃들이 제 빛깔을 잃고 시들어있었다. 촛대봉까지 올라 세석평전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다음 버킷리스트는 천왕봉 오르기다.
천왕봉까지 오래 천천히 걷고 싶어 빠르고 쉬운 코스를 두고 힘들다는 칼바위코스를 선택했다. 역시나 천왕봉 오르는 길은 만만치가 않았다. 산에 오를 때면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던 어느 시인의 노래가 떠올랐다. 나는 또 무엇이 힘들어서 지리산을 오르는가, 내 속을 들여다보면서 걸었다.
산 중턱에는 연분홍 진달래가 아직 피어있고 보랏빛 얼레지꽃도 보였다. 예상시간 보다 늦게 정상에 도착했다. 천왕봉 정상에 표지석에서 사진 한 장만 찍고 서둘러 장터목으로 향했다. 장터목에서 숨을 고르고 다시 중산리로 내려오는데 돌계단이 이어졌다.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걸음이 느려졌다.
오월 마지막 날, 남편 출근하는 것도 모르고 늦잠을 잤다. 잠을 깨 하늘을 보니 상쾌하니 맑았다. 순간, 마지막 버킷리스트가 웅석봉 오르기라는 게 떠올랐다. 서둘러 배낭을 꾸려 밤머리재로 향했다. 공터에 차를 세워놓고 준비운동으로 다리를 풀어주고 들머리로 향했다.
처음부터 길이 비탈졌다. ‘천천히 가자. 서두르다간 금방 지친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30분 정도 올라가니 전망대가 보였다. 멀리 주산이 보이고 그 앞으로 구곡산이 보였다. 그 앞으로는 웅석봉으로 향하는 오르락내리락 능선길이 보였다. 지도를 보면서 대충 거리를 가늠해 보니 시간은 충분해서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세 시간 만에 웅석봉 정상에 도착했다. 탁 트인 저 멀리에 천왕봉이 보였다. 천왕봉을 바라보며 점심을 먹고 다시 밤머리재로 돌아왔다. 그렇게 오월의 버킷리스트를 마무리했다.
나이가 들면 당연히 살은 찌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긴장을 풀고 방심했다. 두 달 동안 꾸준히 걸은 결과는 놀라웠다. 무려 4킬로그램이 빠졌다. 꾸준히 걸으면서 이 정도 살이 빠졌다는 건 희열이었다. 오십이 넘으면서 폐경이 오고 갱년기가 따라온다. 그러면서 건강도 무너지기 쉽다. 매일 새벽마다 두 시간씩 걸으면서 살이 빠진 건 물론 내 몸이 건강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원인 모를 만성 피로감도 말끔히 사라졌다.
지리산 종주를 하다가 그 매력에 빠져 10년 전 귀촌을 했다. 산 중턱에 작은 집을 짓고 남편과 함께 자연 속에 묻혀 살고 있다. 마당에 나와 밤하늘에 별을 올려다보면 가슴이 설렌다. 산을 좋아하고 숲을 사랑하는 나는 산길을 걸을 때마다 숲 냄새에 행복해진다.
지난해 4월 1일에 시작한 나의 버킷리스트는 일 년이 지난 지금 8킬로의 몸무게가 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