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수다
고등학교 때 올랐던 천마산이 산을 좋아하게 만들었다.
가을의 수다
언제나 청춘일 것 같던 여름은 늙었다. 새벽을 알리는 알람 소리에 깨어난 나의 정신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마당으로 나선다. 늘 환한 빛으로 반겨주던 마당은 이제 회색빛 어둠이 차지하고 있다. 풀벌레 울음소리가 둥둥 떠다니는 마당에 내려서니 선선한 바람이 다가와 몸을 감싸 안는다. 갓난쟁이 배밀이 하듯 가을이 오고 있다. 가을이 오면 마음은 어느새 산으로 달려간다. 오색빛깔로 치장하고 있는 가을 산으로 가서 그들과 수다를 떨고 싶어 안달이 난다.
지금까지 많은 산을 올랐다. 그중에 천마산은 내가 정상을 밟은 첫 번째 산이다.
가을이 오면 경춘선 열차의 간이역인 마석역은 분주해졌다. 주말마다 빨간 티에 청바지를 입은 청춘 남녀들을 꾸역꾸역 게워내기에 바빴다. 뜨거운 여름이 수그러들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토요일 오후 나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 정거장에 서서 그들이 일렬로 때로는 삼삼오오 어울려 천마산으로 향하는 모습이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싱그럽게 빛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중학생이었던 나도 그 무리에 섞이고 싶었다. 도대체 그 산에 뭐가 있길래 저들은 주말이면 더없이 즐겁고 행복한 모습을 하고 천마산으로 향하는 걸까?
아마도 중학교 2학년 때였으리라. 수업이 끝나고 종례 시간에 담임 선생님은 가을 소풍은 천마산으로 간다고 했다. 나는 그날부터 소풍날짜만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어 기다리던 소풍날 우린 줄을 서서 천마산을 향해 신나게 걸었다. 하지만 정상까지 오를 거라는 나의 기대는 빗나갔다. 산 입구에 있는 떡갈나무 숲에서 장기자랑과 보물찾기 하고 점심 먹고 가을 소풍은 흐지부지 끝났다. 아쉽게도 중학생 시절을 그렇게 보냈다.
고등학교 일 학년 가을이었다. 토요일 수업이 끝났는데 느닷없이 천마산이 툭 튀어나왔다. 산은 가고 싶은데 혼자서는 엄두가 나지 않아 친구들을 향해 소리쳤다.
“나 내일 아침 일찍 천마산 갈 건데 같이 갈 사람!”
다음날, 새벽 나를 포함한 네 명의 친구들은 분식집에 가서 김밥을 샀다. 전날 사진관에서 빌린 필름 카메라와 김밥을 가방에 넣고 신나게 천마산을 향해 걸었다. 산으로 들어서니 소풍날 왔던 떡갈나무 숲이 나타났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떡갈나무 아래는 갈색 나뭇잎이 떨어져 융단처럼 깔려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낙엽을 두 손에 가득 담아 친구들에게 던지고 깔깔거리며 뒹굴었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도 우리와 함께 웃었다. 얼마나 웃었는지 배에 힘은 빠지고 입술 주변은 마비가 온 듯 경직되었다.
웃다 지친 몸으로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비탈길은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내려갈까? 더 올라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힘들게 나선길 그냥 돌아갈 수 없었다. 서로를 밀고 당겨가며 능선에 올라선 순간, 눈앞에 나타난 풍광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게 했다. 나는 팔을 뻗어 검지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며 친구들에게 소리쳤다.
“야! 저기 저어기 봐봐! 저기도 저기도!” 우리는 그저 와! 와! 하는 소리만 연발했다.
운무가 산허리에 걸렸다가 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로 돌아다녔다. 산봉우리에 물든 떡갈나무 단풍과 운무가 함께 벌이는 유희에 우리도 빠져 버렸다. 막 떠오르는 태양은 그 풍광을 더 황홀하게 만들었다. 멋진 풍광을 놓칠세라 갖은 포즈를 취하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운무가 태양에 밀려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정신줄을 놓았던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정상까지는 오르락내리락하는 능선길이라 수월하게 오를 수 있었다. 능선길을 걸으면서도 재잘재잘 조잘조잘 입은 쉬지 않았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정상이었다. 산 정상에는 작은 돌에 천마산이라는 글씨가 적혀있었다. 우리는 정상석 앞에서 사진부터 찍었다. 너른 바위에 앉아서 준비해 온 김밥을 먹으면서도 수다는 계속되었다. 친구 입안에 김밥이 내 얼굴에 튀어도 웃었고 내가 방귀를 뀌어도 깔깔거리고 웃었다. 정상석 앞에 나란히 앉아 ‘천마산 기슭에 우뚝 솟은 심석탑 비바람 견디며.’로 시작하는 교가도악을 쓰며 불렀다. 그리고 또 까르르 웃었다. 산에서 내려오며 다음 주에 또 오자고 약속했다. 그날 이후 해마다 가을이 오면 우린 천마산을 올랐다. 처음 마주했던 그 황홀한 느낌은 조금 수그러들었지만 여전히 천마산의 가을은 아름다웠다.
서울 근교 남양주시에 속해 있는 천마산은 812미터의 높이로 100대 명산 중에 하나다. 한강에서 피어오른 물안개가 산허리에 머물면 산봉우리에 떡갈나무 단풍이 운무에 올라탄다. 운무와 단풍이 함께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만들어 내는 가을이 아름다운 산이다.
고향에 있는 산이지만 한동안 잊고 있다가 몇 년 전 다시 천마산을 올랐었다. 하지만 그때처럼 황홀하고 신비한 감흥은 없었다.
마당을 서성이던 나는 다락으로 올라가 오래된 앨범을 꺼냈다. 그리고 그때 찍었던 사진을 찾았다. 여전히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 속엔 친구들의 수다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단발머리 소녀들의 가을의 수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