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동생들과 차박을 하느라 2박 3일 집을 비운 적이 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콩이 가득 담긴 비닐봉지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누가 가져다 놓았을까?
나는 누가 가져다 놓은 콩인지도 모른 채, 주방 한쪽에 두고 며칠째 째려보기만 했다.
어제 아침이었다. 아침 먹은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그 콩이 나 좀 어떻게 해 보라는 듯이 자꾸 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그래서 저녁에 콩국수를 만들려고 콩을 깨끗이 씻어 물에 담가두었다. 5~6시간쯤 지나서 콩 상태를 확인해 보니 그 사이 불은 콩의 양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 이걸 다 어쩐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불린 콩을 한번 더 헹궈 냄비에 붓고 콩이 잠길 정도로 물을 부었다. 뚜껑을 열고 물이 끓기 시작하면서 4분을 더 끓였다. 인덕션이라 시간을 4분에 맞춰 놓으니 조절하기가 아주 수월했다. 삶은 콩은 찬물에 헹구어 손으로 비벼가며 콩 껍질을 벗겼다.
나는 어린 시절 먹었던 할머니 콩국수를 무지 좋아한다. 할머니는 삶은 콩을 맷돌에 갈아 광목 자루에 넣었다. 자루를 주무주물 짜면 콩물이 미세한 구멍사이로 빠져나오느라 뿌지직 삐지직 하면서 울음소리를 냈다. 할머니는 그렇게 짜낸 맑은 콩물만 가지고 콩국수를 만들어 주곤 하셨다.
나는 물과 콩의 비율을 1대 1로 잡아 믹서기에 갈았다. 요즘은 콩을 갈 때 우유를 넣기도 하고 잣이나 땅콩을 갈아서 넣기도 한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고소하고 맛있다는데 나는 그 맛이 싫다. 그냥 순수한 콩의 맛을 즐긴다. 나도 할머니처럼 맑은 콩물로 만든 콩국수를 먹고 싶었지만 비지가 아깝다는 핑계를 대며 그대로 먹기로 했다. 사실은 게으른 귀차니즘이 한 몫했다. 얼음을 듬뿍 넣어 저장고에 두고 남편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퇴근한 남편이 땀을 씻어 내는 시간에 맞춰 나는 국수를 삶았다. 콩물을 붓고 고명으로 오이채와 직박구리에게서 구해 낸 후숙 토마토를 얇게 썰어 얹었다.
콩물과 잘 어우러지라고 미리 만들어 둔 소금물 종지를 남편 앞으로 밀었다. 나는 콩국수를 먹을 때 간을 하지 않는다. 부부가 한 그릇씩 잡고 식탁에 마주 앉았다. 먼저 국물부터 한 숟갈 떠서 맛을 보았다.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콩물의 깔끔한 맛과 고소한 맛이 입안 가득 번졌다.
할머니의 콩국수 맛의 절반도 못 따라가는 맛이지만 난 충분히 만족했다.
남은 많은 양의 콩물은 도시에 사는 동생들이 오후에 내려온다니 또 국수를 삶아야겠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모르지만 덕분에 맛있는 콩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그 고운님이 누구인지 심증은 가는데 아직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다. 고운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