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기까지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동안 보자기에 싸서 가슴 한쪽 구석에 꽁꽁 숨겨 두었던 이야기다. 나의 취미는 걷기, 등산, 글쓰기, 바느질하기, 등등 다양하다. 그중에 바느질 여행을 하게 된 사연을 써보려 한다.
나는 버스도 오지 않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깊은 산골에서 태어났다. 계집애가 영악스러워 어디에 써먹겠냐는 소리를 들어가며 자랐다. 벽지 학교에서 나름 똑소리 나게 공부도 잘해서 6년 내내 우등상을 타며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담임선생님 권유로 동네 중학교가 아닌 시내에 있는 사립 중학교에 입학했다. 아들 딸의 차별이 심한 우리 집에서 오빠도 아닌 나를 시내에 있는 중학교에 보내준 게 지금도 이해가 되진 않지만, 그때는 중학교에 다니면서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동이 트기 전부터 걸어 나와 한 시간 이상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은 꿈을 심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 꿈은 뿌리내리지 못했다.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 여름, 아버지는 위암 판정을 받고 수술했다. 투병 중에도 두 살 위 오빠를 대학에 보내려고 인천에 월세방을 얻어 고등학교에 다니게 했다. 그럴수록 나의 꿈은 시들어 갔다.
고등학교 원서를 쓰고 싶다고 하니 지금, 이 상황에 무슨 고등학교냐고 단숨에 꿈을 깨버린 엄마, 동생들 가르쳐야 하니 졸업하면 공장에 가서 돈 벌어 오라던 엄마, 떼조차 쓸 수 없었던 상황에 꿈은 점점 사라졌지만 공부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희망은 있었다. 모교 이사장이 설립한 야간고등학교였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들은 낮에는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할 수 있었기에 야간 학교에 입학했다. 낮에는 재봉틀 발판을 밟으며 와이셔츠를 만들었다. 밤에는 학교에 가서 졸린 눈을 비벼가며 공부를 했다. 힘든 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자퇴하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버텼다. 일에 쫓겨 지문은 닳아 없어지고 잠이 부족해 졸다가 바늘에 손가락이 찔려 반창고가 떨어질 날이 없었다. 오물을 퍼내야 하는 냄새나는 화장실 벽에 기대서 쪽잠으로 부족한 잠을 자가며 버텼다. ‘학교만 졸업해 봐라. 다시는 재봉틀 발판을 밟지 않을 거다.’ 그렇게 삼 년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러나 3학년이 되던 해 여름, 긴 투병 끝에 아버지는 노모와 젊은 아내 그리고 7남매를 두고 떠났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군대에 간 오빠, 학교에 다니는 어린 동생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장 아닌 가장이 되었다. 엄마는 내 손을 잡아끌고 평화시장으로 가서 봉제공장에 취직시켰다. 나는 또 밤낮으로 재봉틀 발판을 밟았다. 월급 받는 다음날이 되면 엄마는 어김없이 공장 입구에서 나를 기다렸다. 약간의 돈만 내 손에 쥐어주고 모조리 가져갔다. 꿈은 사라지고 재봉틀 소리는 지겨웠지만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린 동생들은 넷이나 있고, 엄마는 여전히 찾아오고 도저히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루하루 지쳐 가고 있는 그때 군대에 갔던 남자친구가 제대했다. 그 남자도 가난한 집 장남이었다. 하지만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결혼뿐이었다. 다행히 그 남자는 나를 아주 많이 사랑했다. 그렇게 도망치듯 그 남자와 결혼했다. 드디어 재봉틀 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잊었다.
달맞이 회원들이 모여 틈틈이 만든 생리대 포장작업하고 있다.
이제 내 나이 육십을 코앞에 두고 있다. 지금 나는 작업실에 앉아 재봉틀 발판을 가볍게 밟고 있다. 십이 년 전 산청으로 귀촌하면서 다시 재봉틀을 구입했다. 자연에서 살고 싶어 귀촌하면서 하고 싶었던 일 중 하나가 놀이 삼아 내 옷 정도는 만들어 입는 거였다. 지금은 내 옷을 만들어 입고 남편 옷도 만들어 입히며 행복한 바느질 여행 중이다.
가나의 한 마을에 보내진 생리대를 받은 사람들과 선교사분
달맞이 회원의 자격으로 생리대가 없어 옷으로 막고 있다는 이웃 나라 어린 소녀들, 그 소녀들을 위해 소창으로 생리대와 속옷을 담아 보낼 주머니도 만들며 재능기부 여행을 하고 있다. 이제는 재봉틀 소리가 지겹지 않다. 오래도록 즐기고 싶다. 재능기부와 함께하는 바느질 여행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