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생리대를 만들어 가난한 이웃나라에 보내는 달맞이 모임을 5년째 이어 가고 있다.
3명의 회원으로 시작했던 일은 현재 20여 명이 분업화해서 일을 한다.
전국에는 의료 복지 사회적 협동조합이 여러 곳 있다.
경상남도 산청에도 몇 년 전부터 출자금을 모아 설립한 화목 한의원이 있다. 전국의 조합마다 여러 개의 소모임이 있는데 달맞이 모임도 거기에 속해 있다.
지난해 많은 소모임 중에 우리 달맞이 모임이 우수한 모임으로 1등으로 선정되었다. 우리는 1등 보다. 재료를 구입해야 하는 상금이 더 절실했다. 상금이 무려 백만 원이나 되었다. 두 달에 한 번씩 제품을 보내는데 기본 소요되는 금액이 100 만원이기에 재정난이 심각한 우리 모임이 1등을 했다는 것은 경사였다.
천생리대 만드는 봉사 회원을 모집한다고 했을 때의 기억이다. 가지고 있는 재능은 나누고 싶은데 처음 가는 곳을 많이 낯설어하는 나의 성향은 자꾸 주변을 서성거리게 했다.
용기를 내어 모임의 문을 두드렸다. 회원들은 의욕은 충만한데 기술은 미약했다.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하나 하나 회의를 하고 방법을 고치고 작은 기술이나마 알려 주며 여기까지 왔다.
내가 처음 재봉틀 발판을 밟기 시작한때가 열 입곱살 때였다. 중학교 1학년때 아버지가 암으로 몸져누우며 가난했던 가정형편은 더 어려워졌다. 고등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한 상황에 다행히도 모교에는 야간고등학교가 있었다. 모교는 고인이 되신 김우중 회장님이 설립한 종합 중, 고등(인문과. 상과. 방직과) 학교였다. 김 우중 회장은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낮에는 공장에서 와이셔츠를 만들고 밤에는 학교에 방직과반을 만들어 공부를 할 수 있게 했다. 야간반에 진학해서 낮에는 공장으로 밤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동동거리는 삶은 고되기만 했다. 하지만 고달픈 삶 보다 더 싫었던 건 공장일이 끝나고 학교로 갈 때 중학교 때 친구들은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데 그 친구들과 마주할 때였다. 친구들이 반갑다고 손을 흔들면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얼굴을 돌리고 외면했다. 학교만 졸업해 봐라. 재봉틀은 쳐다보지도 않을 거라고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3학년이 되던 해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나는 가장 아닌 가장이 되었다. 졸업과 동시에 평화시장 봉제공장에 취직했고 월급은 동생들 학비에 보탰다.
그 일에서 벗어나고 싶어 도망치듯 결혼하면서 재봉일은 잊고 살았다.
귀촌 후, 다시 재봉틀을 구입해서 취미로 내 옷을 만들어 입다가 달맞이 모임을 알게 되었다
먹고살기 위해 이 악물고 일을 할 때는 더없이 불행했다. 그래도 젊음이 있고 희망이 있어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몸으로 익힌 일은 세월이 흘러도 기억한다고 했다. 30년이 지난 후, 내 몸은 옷 만드는 방법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지긋지긋 해 했던 일이 취미로 다가서니 재봉일은 즐거움이 되었다. 더해서 나의 아주 작은 재능을 나누니 따뜻한 감동은 몇만 배로 돌아왔다.
달맞이 모임이 소문나면서 곳곳에서 원단을 후원하는 분에 만원부터 몇 십만 원, 크게는 백단위를 넘는 후원자도 있다. 점점 이기적으로 각박해지고 있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나눔을 베풀며 사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러니 세상은 또 살만하지 아니한가!
저녁 운동을 하며 새해 첫 보름달에게 작은 소원하나 빌었다. 지금처럼만 건강하게 살게 해 주세요. 오래도록 제 작은 재능을 나눔 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