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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거인 Jul 05. 2023

살구가 떨어졌다.

산까치가 내 살구를 망가뜨렸다.

 
  딱 한 알 달린 살구가 익기도 전에 떨어졌다. 5년 전, 살구를 먹고 그 씨앗을 흙 속에 묻었다. 이듬해 싹을 틔우더니 나무가 되고 지난해 첫 꽃을 피웠다. 올해는 꽃을 무성하게 달고 마당을 환하게 밝혀주더니 열매까지 제법 달았다. 살구를 먹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다 떨어지고 겨우 한 알만 가지 끝에 달려 있었다. 눈만 뜨면 마당에 나가 확인하며 노랗게 익기를 오매불망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린 살구가 익기도 전에 떨어져 아깝고 속상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살구는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내게 살구는 고향이었고 할머니와 엄마, 내 형제들이었다. 고향집 울타리에는 커다란 살구나무가 있었다. 특별히 거름을 주지 않아도 해마다 꽃이 피고 열매도 주렁주렁 달렸다. 주전부리 귀하던 시절 우리 형제들에게 유일한 군것질거리였으니 익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기만 했다. 큰 나무는 봄이면 눈이 부시게 핀 꽃이 칙칙한 회색빛 스레트 지붕을 환하게 만들어 주었다. 장마가 시작되는 초여름이 되면 노랗게 익기 시작했다. 밤새 비가 세차게 내린 아침이면 뒤뜰에는 ‘퉁퉁’ 불은 살구가 빗물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졌다. 떨어진 살구는 먼저 일어나는 사람 차지였다. 나는 동생들이 깰세라 조심조심 이불속을 빠져나왔다. 동생들이 깨면 살구 쟁탈전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살금살금 뒤뜰로 가서 떨어진 살구를 주어 묻은 흙은 낙숫물에 씻고 반으로 쪼갰다. 씨앗만 빼내고 통째로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빗물을 가득 머금은 살구는 씹지 않아도 흐물흐물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초등학교 6학년 겨울 방학 때였다. 엄마가 막냇동생을 낳았다. 졸업을 앞둔 나는 조그만 아기가 엄마 젖을 빨고 쌔근쌔근 잠자는 모습이 신기해 겨울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고 봄을 맞았다. 그러는 사이 중학생이 된 나는 학교에 적응하느라 살구나무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문득 생각이 나서 나무를 보니 어느새 꽃이 피고 있었는데 예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드문드문 피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매일 나무를 올려다보지만 더 이상 꽃은 피지 않았다.
 할머니는 엄마가 막내를 가져서 입덧하느라 익지도 않은 열매를 따 먹어서 그렇다고 했다. 임신한 여자가 나무에 올라가면 부정이 타서 죽는 거라고 했다. 그때 나는 엄마의 입덧이 뭔지. 왜 익지도 않은 열매를 따 먹었는지, 그렇다고 부정 타서 나무가 죽고 있다는 할머니의 말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시들시들 죽어가던 나무는 장마철이 되어도 세차게 비가 내려도 더 이상 살구를 떨구지 않았다.

 살구가 나무에 달려 있을 때 동생이 왔다. 동생은 비가 오면 떨어진 살구를 주워 먹던 추억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참 맛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살구를 만날 수 없다며 그리워하는 동생에게 익었을 때 또 와. 이젠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반쪽씩 나누어 먹자며 웃었다. 그런데 산까치가 물앵두를 따 먹고 왕보리수를 따 먹더니 이제 익기 시작한 살구까지 쪼아서 떨어뜨렸다. 허망하고 안타까워 버리지도 못하고 접시 위에서 시들어가는 살구를 쳐다만 보고 있다가 개복숭아 청  담가둔 통에 쪼개 넣었다.


 나의 고향. 나의 할머니. 나의 엄마. 나의 형제들을 만나기 위한 기다림은 다시 시작이다.

'일 년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나이가 들어갈수록 시간은 금방 간다는 것을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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