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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람 맞으며 걷는 길

가을에 만난 겨울

by 작은거인


손전등의 빛은 칠흑처럼 어두운 길을 가른다. 고요 속에 바람만이 아우성치는 새벽, 계곡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지리산으로 든다. 매섭게 부는 바람 소리에 자박자박 걷는 발걸음 소리가 섞인다.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는 공포감으로 다가와 스스로를 다독이며 산길을 오른다.



칼바위를 지나 법계사로 향하는 길은 갑자기 가팔라진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칼바위 상단에 올라서니 짙은 어둠 틈으로 미영이 스며든다. 그 빛 너머로 펼쳐진 능선 너머에 천왕봉은 구름이 가렸다. 뒤로 돌아서니 능선에서 붉은 해가 솟구치며 어둠을 밀어낸다.

법계사를 지나자 구름을 밀어내는 햇살 사이로 문창대가 아주 작게 다가온다. 나는 잠시 멈춰 합장하고 안전산행을 비는 작은 기도를 올린다.


가빠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개선문을 지나자 칼바람은 더 사납게 달려든다. 휘청거리는 몸을 다잡으며 정상부로 향하는 능선을 바라본다. 산등성이마다 상고대가 피어 햇살에 반짝인다. 눈부신 풍광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상고대가 바람에 부딪혀 부서지며 사방으로 흩날린다. 햇살에 녹아 사라지기 전에 만나야 한다. 추위와 싸우며 산을 오르느라 지친 나는 기어가다시피 정상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정상에 올라서니 눈꽃 세상이 펼쳐졌다. 칼바람은 내 어깨를 사정없이 흔들고 상고대는 햇살을 피해 숨어든다. 바람을 견디며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하얀 터널을 걷는다. 곧 사라질 아름다운 풍경을 담기 위해 사진을 찍는 손끝이 아려온다,

내가 바로 지리산이라고 외치는 듯한 매서운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장터목 쪽으로 향한다. 추위를 이기려고 부지런히 걷지만, 강풍에 한 걸음 내딛기도 힘들다.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한기에 두통이 일고 몸은 굳어간다. 언 몸을 녹이려 바람이 쉬어가는 양지를 찾아 앉았다. 배낭에서 보온병을 꺼내 따뜻한 커피 한 모금 넘긴다. 눈앞에 펼쳐진 산그리메는 칼바람 앞에서도 여전히 장엄하다.

시간이 지나도 잦아들지 않는 바람을 피해 장터목 대피소에 들어섰다. 점심을 먹으며 산행을 이어가야 할지, 여기서 하산해야 할지 망설인다.

애초의 계획은 중산리에서 천왕봉을 올라 제석봉 능선을 지나 연화선경 능선으로 세석을 거쳐 거림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람은 여전히 사납고, 겨울을 준비하지 못한 몸은 이미 꽁꽁 얼었다. 더는 무리라고 결정하고 중산리 길로 하산을 결정했다.



계곡의 물소리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유암폭포가 나타난다긴 산행에 지친 다리도 쉴 겸 배낭을 내려놓고 폭포 앞에 앉았다. 거대한 암벽을 타고 내리쏟는 은빛 물줄기가 차가운 공기를 씻어내고, 붉은 단풍과 푸른 하늘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번진다.

눈을 감고 물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바람이 지나며 가을향기를 데려온다. 새벽부터 걸었던 길이 시나브로 스치고 걷지 못한 연화선경 아련하게 떠 오른다.


지리산의 가을이 보고 싶어 떠난 길, 정상에서 상고대를 만난 것은 더 할 수 없는 행운이었다. 미처 겨울을 준비하지 못한 후회가 뼈저리게 다가왔다.

오늘 걷지 못한 연화선경 길은 내일의 그리움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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