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품에 처음 안기던 날

며칠째 엄청난 비가 내렸다.

by 작은거인

밤은 깊어가는데 천둥 번개까지 동반하고 요란하게 내리는 빗소리에 쉬이 잠들지 못했다. 뒤척이다 맞이한 아침,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뜨거운 햇빛을 쏟아내고 있다. 비 온 뒤의 상쾌함을 느끼고 싶어 물구경을 나섰다.


하동호에 가서 지리산둘레길을 걷는데 맑은 하늘은 그늘 하나 없는 길을 뜨겁게 달구고, 호수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가 주변 풍광에 운치를 더했다. 돌아오는 길에 거림계곡을 찾았다. 장맛비에 불어난 물살이 거칠게 흐르고 있었다. 다리 위에 서서 흐르는 물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안겨서 개울을 건너던 때가 생각나 울컥했다.

학교에 가려면 십리 길을 걸어가야 했다. 밤나무 숲을 지나고 마을을 지나 논두렁 길을 걷다 보면 그 끝에 커다란 개울이 나온다. 개울에는 난간도 없이 겨우 버티고 서 있는 오래된 나무다리가 있었다. 다리 위를 걸을 때면 삐걱삐걱 울음 우는 소리가 났다. 낡은 다리를 건너면 좁은 오솔길이 이어지다 이내 가파른 언덕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 길을 헉헉거리고 올라가다 보면 산 중턱에 학교가 있다.

일 학년이던 나는 언제나 친구들과 놀며 떠들며 학교에 갔다. 며칠째 많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날은 엄마가 6학년이던 언니와 함께 가라고 했다. 친구들과 같이 가고 싶었지만, 엄마의 엄포에 언니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한 개밖에 없는 우산은 이미 오빠 차지가 되었고 우리는 비료포대를 삼태기 모양으로 찢어서 뒤집어썼다. 언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앞서갔다. 종종걸음으로 언니 뒤를 따라가는데 비료포대가 자꾸 벗겨졌다. 벗겨진 포대를 다시 쓰랴, 걸음 빠른 언니 뒤를 따르랴, 정신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다리 앞이었다. 불어난 흙탕물은 다리 바로 밑까지 차올라 넘실거리고 있었다. 거친 물살을 견디며 겨우 버티고 서 있는 다리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다리 위를 건너다가 무너질 것 같은 공포감이 밀려왔다. 언니는 머뭇거리는 내 손을 잡아끌고 빠른 걸음으로 건너갔다. 엄마가 왜 언니와 같이 가라고 했는지 이유를 그때 알았다. 학교에 도착하니 비료포대를 쓰고 온 보람도 없이 흠뻑 젖었다. 젖은 몸으로 오들오들 떨며 공부하는데 다행히 수업이 끝날 때쯤 비가 멈췄다.

집으로 가기 위해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오다 보니 개울 물이 넘치던 아침의 다리는 잊어버린 채 다리 앞에 도착했다.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다리가 사라졌다. 물살은 여전히 거칠게 흐르는데 다리가 없었다. 개울 양쪽 끝 기둥만 물살을 버티며 흔들리고 있었다. 겁을 먹은 여자아이들이 울기 시작했다.

그때 아래쪽에서 ‘얘들아! 이쪽으로 내려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일제히 소리 나는 쪽을 향해 달렸다. 다리가 있던 곳보다 수심이 얕고 물길이 약한 그곳에 마을 어른들이 모여있었다. 새끼줄 끝을 커다란 나무에 묶고 각자 허리에도 줄을 연결하여 개울을 가로질러 서 있었다. 그 맨 앞에 아버지가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아버지를 향해 달려갔다. 아버지는 나를 본체만체 옆으로 밀쳐버렸다. 나는 길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고 무안함에 울음을 터트렸다. 아버지는 그런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남자아이들부터 안아서 옆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그렇게 친구들을 다 건네주고 나서야 나를 덥석 들어 품에 안았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목을 꽉 끌어안고 손깍지를 끼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퀴퀴한 땀 냄새가 훅! 하고 덤벼들었다. 아버지는 개울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올라가라고 손짓한 후, 한 손으로는 나를 안고 한 손으로는 밧줄을 잡고 개울을 건너갔다. 그리곤 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나를 무심히 툭 내려놓고는 돌아섰다. 나 먼저 건네주지 않고 다른 친구들부터 챙기는 아버지가 미워서 울음을 터트렸다. 아버지는 우는 나를 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무색해진 나는 울음을 그쳤다. 집으로 오는 내내 논두렁 죄 없는 풀들에게 괜한 헛발질을 해댔다. 그해 가을, 개울에는 튼튼한 시멘트 다리가 생겼다.


그날, 마지막에 나를 건네준 아버지 마음을 헤아리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날 이후 다시 그 품에 안긴 기억은 없다. 아버지 품에 안긴 처음이자 마지막 날이었다. 아버지를 떠올리는 지금도 퀴퀴한 그 냄새가 환영처럼 코끝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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