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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거인 Oct 29. 2023

나는 왜 코바늘을 잡았을까?




새벽 여섯 시. 강가에선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그 물안개는 음흉한 빛을 만들어 낸다. 나는 음흉한 분위기를 즐기며 길을 걷는다. 그리고 달린다. 두 시간 만에 흠뻑 젖은 몸으로 집에 도착한다. 아침식사용으로 감자를 안쳐 놓고 반신욕을 한다. 30여분 반신욕을 즐긴 후, 커피를 내려서 찐 감자와 함께 먹으며 오늘 할 일을 정리한다.

아침 먹고 작업실에 들어가 주문받은 찻자리 만들고 재능기부 파우치 재단 하고 늦은 오후엔 들깨를 털어야지. 까지가 하루의 계획이다.

 전날 저녁, 손이 심심해서 코바늘을 잡았다. 수납장을 열고 볼펜을 찾다가 올봄 다이소에서 구입해 쳐 박아 두었던 플라스틱 가방 손잡이가 눈에 띄었다. 그걸 보는 순간 친구가  필요한데 쓰라고 보내준 실을 찾아냈다. 어느새 코바늘 잡은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늦은 밤 쏟아지는 잠에 밀려 그대로 거실에 놓아두고 잠이 들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아침을 다 먹기도 전에 코바늘이 내손에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 계획도 밑그림도 도안도 없이 손이 가는대로 코바늘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뜨다가 이건 아니야 다시 풀고를 반복하다 보니 시간은 이미 정오를 넘기고 있다.
점심을 먹으 후에도 여전히 머릿속은 작업실의 일거리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나의 엉덩이는 갱엿을 깔고 앉아 있는 것처럼 거실 바닥에 들러 붙어 있다.

  이제 거실의 시곗바늘은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다. 멍멍이들 밥도 줘야 하고 닭장에도 가 봐야 한다. 저녁 준비도 해야 한다. 결국 엉덩이에 눌어붙은 갱엿을 힘겹게 떼어 내며 일어난다.
장시간 앉아 있던 탓에  마디마디의 뼈들이 삐그덕 거리며 아우성을 친다.
 

  집 주변을 한 바퀴 돌며 멍멍이들과 닭들의 식사를 챙기고 김장꺼리가 자라고 있는 텃밭을 둘러본 후. 주방으로 들어선다.





 결국 저녁을 먹고 나서 가방을 완성했다. 뭔가 허전한 것 같아 맛보기로 리본을 달아본다. 에이!  다시 떼어낸다. 한복을 예쁘게 만들어 입고 같이 들면 이쁘겠다는 상상을 하며 이리저리 매만진다.
 
 꼬리뼈에 군살이 박히도록 앉아 있던 결과로 가방은 생겼지만 할 일은 또 내일로 밀렸다.  '나는 왜 왜 코바늘을 잡았을까?'  후회라는 놈이 내게  백 미터 달리기로 뛰어오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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