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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거인 Nov 02. 2023

생각을 버리러 나선 길



 전날 저녁 친구와 톡으로 대화를 하는데 잊고 있던 감정이 꿈틀거렸다.
그 감정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꾸역꾸역 밀고 올라왔다. 오래 묵어 이제 약해질 법도 하건만 한 번씩 밀고 올라오면 쉬이 수그러들지 않았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지만 감정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아침까지도 내 속을 박박 긁어댔다. 습관처럼 배낭을 꾸려 숲으로 향했다.

복잡한 생각을 버리고 싶을 때마다  찾는 곳은 지리산 남부능선 끝자락인 삼신봉이다.
숲에 들어서면서  나를 긁어대는 감정을 길에 쭈욱 깔아 놓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꼭꼭 눌러 밟으며 이렇게 속삭였다.  "까불지 마!  나는 너란 놈에게 절대 휘둘리지 않을 거야! 너 때문에 난 울지 않을 거야!"

 

 나는 점점 더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잎을 떨군 숲은 '비움의 미학'이라는 단어를 떠 올리게 했다. 비우니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 비움의 미학 속에 내가 있었다. 숲을 만지고 느끼고 호흡하며 가슴에 담았다. 그러는 사이 억울함의 감정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환희가 가득 들어찼다.
말 그대로 만추였다. 내 마음까지도,




 가을과 수다를 떨며 정상까지 오르는 동안 오로지  혼자였다. 지리산 너른 품속에 혼자라는 것이 너무 좋았다. 미세먼지가 많아서 먼 산의 풍광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그대로를 즐기면 되는 것이다.
 너른 바위에 철퍼덕 주저앉아 서툰 솜씨로 오카리나를 불었다. 나의 살던 고향을 부르고
산토끼도 부르고 퐁당 퐁당도 부르며 혼자 놀기에 빠져 있는데 아래서 인기척이 들렸다.
방해꾼들이 속속 정상을 향해 올라왔다. 혼자 놀기는 글렀다는 생각에 서둘러 배낭을 메고 산을 내려왔다.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고 나니 또 엉덩이가 들썩 거려 다시 나섰다.
중산리 주차장에 도착하니 바람이 제법 강하게 불었다. 강한 바람에 노랗게 물든 은행나뭇잎이 휘날렸다. 바람아 더 세게 불어라.



오후의 바람이 커피 향기를 실어왔다. 그 향기는 생태탐방로의 숲 속에 있는 카페를 찾게 했다.



 텅 빈 카페에는 아메리카노와 음악 그리고 나뿐이었다.
카페 구석에서 관계의 힘이라는 책을 골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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