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부터 비나 눈을 좋아했다. 비나 눈이 와도 우산을 잘 쓰지 않았고 그대로 맞는 걸 좋아했다. 비나 눈이 몸에 닿을 때 뭔가 씻겨나가는 느낌이다. 엄마가 우산을 도시락과 함께 챙겨놔도 일부러 두고 나간 적이 많았다. 내 친구는 내가 초등학생 때 운동장에서 혼자 비 맞는 걸 보고 미친년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영상기자가 되고부터 나서는 비나 눈이 별로 반갑지 않다. 비나 눈은 나를 너무 힘들게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특히나 한국은 여름엔 비도 많이 오고 겨울엔 눈도 많이 와서 홍콩에 있을 때보다 더 힘들다.
작년 여름은 폭우로, 태풍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강원도 지역의 연일은 집중호우로 한강의 홍수조절 최후 보루인 소양강댐이 제한 수위를 초과하자 3년 만에 소양강댐 수문을 개방했고 한강 일대와 잠수교는 11일 동안 잠기면서 39년 만에 '최장 잠수 기록'을 경신했다. 영상기자들은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백팩이라고 부르는 MNG 장비를 들고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가평 폭우 피해 취재 및 연결을 갔을 때, 집집마다 토사물이 가득 차고 또 몇몇 집은 무너져 내린 모습을 보도하기 위해 폭우 속으로 뛰어들었다. 장비들이 비에 젖으면 안 되니 레인커버와 김장봉투를 이용해 카메라와 백팩을 이중으로 싸고 장화와 우비를 챙겼다. 사실 폭우 속에서는 장화와 우비는 거의 쓸모가 없다고 봐야 하고 다 젖는다고 봐야 하는데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레인커버와 김장봉투를 이용해 카메라와 백팩을 이중으로 쌌어도 계속 신경을 써야 한다. 오디오 라인이나 마이크도 비에 젖으면 안 되니 사용하지 않을 때 봉투에 잘 싸놨다가 사용 직전에만 뺀다. 연결 시간 고작 그 몇 분을 기다리는 동안 마이크가 젖어 오디오가 이상하게 들어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림도 신경을 써야 한다. 비가 내리면 카메라 렌즈에 물이 튈 수밖에 없다. 그림에 물방울 모양이 맺히면 안 되기에 계속 카메라 렌즈를 닦으면서 취재 및 연결을 해야 한다. 원래 하던 대로 많이 돌아다니며 최대한 다양하게 그림을 찍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이야기다. 기자 연결 때는 그래도 위에 무언가 비를 막아줄 수 있는 지붕이 있는 곳을 찾기 위해 발로 뛰어야 하고 좀 더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곳곳을 직접 걸으며 생중계를 하기로 결정하면 높게 쌓인 토사물과 싸워야 한다. 세상 정신이 없다. 끝나고 나면 내 꼴은 그야말로 흙탕물에 빠진 생쥐다. 내 머리카락이 물미역이 돼도 나를 신경 쓸 새는 단 한순간도 없다.
제주도 하이선 태풍 취재 및 연결을 갔을 때는 더 힘들었다. 폭우 속에서 몰려오는 태풍을 찍을 때엔 내 몸도 멘탈도 만신창이가 된다. 바다가 그렇게 무서운 줄 몰랐다. 다 잡아 삼켜버릴 거 같았다. 그래도 정신줄을 붙잡아야 한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비가 쏟아져도 렌즈를 닦아가며 찍는다. 밤바다를 찍어야 할 때엔 조명도 신경을 써야 한다. 조명으로 충분치 않으면 자동차 쌍라이트를 켜서라도 찍는다.
작년 겨울은 폭설도 만만치 않았다. 일단 위에서 설명한 거 외에도 강추위와 싸워야 한다. 핫팩을 아무리 많이 챙겨도 손이 얼어 카메라 렉 버튼을 누르기 힘들 때도 많다. 발은 동상에 걸린 거처럼 꽁꽁 언다. 몸이 얼었다 녹으면 열이 날 때도 있다. 연결 시간을 앞두고 기온이 너무 낮아 백팩이 얼어 전원이 들어오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땐, 내가 입은 패딩을 벗어서라도 백팩을 녹인다.
자연은 무섭다. 인간은 자연 앞에 정말 너무나도 작은 존재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매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현장에 뛰어드는 모든 선후배들을 존경한다.